항목 ID | GC0340026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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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朝鮮時代 |
영어의미역 | Joseon Period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남도 하동군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김준형 |
[정의]
1392년에서 1910년까지 경상남도 하동 지역의 역사.
[연혁 및 행정 구역]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도 아직 수령이 파견되지 않은 규모가 작은 속읍(屬邑)이 적지 않게 존재하였다. 태종 대에는 이런 고을들을 두세 개씩 통합하여 수령을 파견하는 조치를 취했다. 하동현과 남해현은 이미 수령이 파견되어 있는 고을이었지만, 1414년(태종 14) 8월 두 고을을 합쳐 하남현(河南縣)으로 개칭하였다가 이듬해 3월 다시 이전 상태로 복구, 별도의 고을로 독립시켰다.
이후 하동의 행정 구역은 별다른 변화가 없다가 1702년(숙종 28) 섬진강 일대가 방어상 중요한 지점이라는 고을 주민들의 주장이 받아들여졌다. 그리하여 진주에 속해 있던 악양(岳陽), 화개(花開), 진답(陳沓), 적량(赤良) 등 4개 리[실제로는 면에 해당됨] 지역을 하동에 편입시켰다. 이에 따라 하동의 영역은 2배가량 확장되었다. 1703년에는 고을 관아도 현내면[현 고전면] 고하리에서 진답면[현 하동읍] 두곡(豆谷)마을로 옮기고, 1704년에는 고을의 읍격도 현(縣)에서 도호부(都護府)로 승격시켰다.
이후 1730년에는 고을 관아를 나동(螺洞)으로 옮겼다가, 1745년에 다시 항촌(項村)으로 옮겼다. 하동부의 면도 고현면(古縣面), 서량곡면(西良谷面), 동면(東面), 내횡포면(內橫浦面), 외횡포면(外橫浦面), 북면(北面), 팔조면(八助面), 마전면(馬田面) 등 원래 8개의 면에 4개 면이 추가되어 12개 면으로 늘어났다.
[인구와 성씨]
정조 대의 『호구총수(戶口總數)』에 의하면, 하동 전체의 호수가 4,221호, 인구는 2만 549명인데, 이중 1702년 진주에서 편입된 진답·적량·악양·화개 등 4개 면의 호수가 2,000호, 인구가 9,275명이어서 절반가량을 차지한다. 따라서 원래의 하동 지역에 새로이 편입된 4개 면의 인구가 합쳐져 인구가 두 배 정도로 증가한 셈이다.
조선 시대 하동 지역의 세거 성씨를 보면, 조선 중기까지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등의 하동현 토성조에 정·곽·이·하씨 등이 기록되어 있다. 악양의 토성으로는 도·오·임·손·박씨가, 화개의 토성으로는 김씨가 보인다. 악양과 화개는 진답·적량과 함께 1702년(숙종 28) 진주에서 하동으로 분속되었다.
조선 후기의 지리서인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하동 정씨(河東鄭氏), 진주 정씨(晉州鄭氏), 연일 정씨(延日鄭氏), 광주 김씨(光州金氏), 용궁 김씨(龍宮金氏), 월성 김씨(月城金氏), 안동 김씨(安東金氏), 함창 김씨(咸昌金氏), 의성 김씨(義城金氏), 김해 김씨(金海金氏), 완산 이씨(完山李氏), 공산 이씨(公山李氏), 합천 이씨(陜川李氏), 전의 이씨(全義李氏), 금구 이씨(金溝李氏), 성산 이씨(星山李氏), 진주 강씨(晉州姜氏), 밀양 손씨(密陽孫氏), 창녕 손씨(昌寧孫氏), 은진 임씨(恩津林氏), 문경 송씨(聞慶宋氏), 안동 권씨(安東權氏), 의령 여씨(宜寧余氏), 완산 전씨(完山全氏), 창원 공씨(昌原孔氏), 단성 문씨(丹城文氏), 창녕 조씨(昌寧曺氏), 진주 류씨(晉州柳氏), 창녕 성씨(昌寧成氏), 이천 서씨(利川徐氏), 대구 서씨(大丘徐氏), 김해 허씨(金海許氏), 함양 박씨(咸陽朴氏), 철성 박씨(鐵城朴氏)의 순서로 하동의 성씨가 정리되어 있다. 그런데 이때 진주 하씨가 언급되지 않은 것이 주목된다. 진주 하씨는 1906년까지 진주에 속했던 하동의 옥종면에 주로 세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교통과 통신]
역(驛)은 공문서의 전달과 관리의 왕래, 숙박 및 공물 진상 등의 관물 수송을 담당하던 곳으로 참(站)과 같은 뜻으로 사용하였다. 조선 시대에는 고려 시대의 역원제를 재정비·강화하여 전국에 걸쳐 540여 개의 역을 대·중·소로 등급을 정하여 설치하였다. 원은 각지의 요로(要路)나 인가가 드믄 곳에 설치하여 관원만이 아니라 일반 여객들에게 숙식의 편의를 제공하는 일종의 여관이었다. 하동 지역의 역으로는 정수역(正水驛)·평사역(平沙驛)·횡포역(橫浦驛)·율원역(栗院驛)·마전역(馬田驛)·양포역(良浦驛)이 있었으며, 원으로는 횡포원(橫浦院)과 노량원(露梁院) 두 곳이 있었다.
봉수(烽燧)는 횃불[烽]과 연기[燧]로 변방의 위급한 상황을 본읍(本邑)과 중앙에 전달하던 군사적 목적의 통신 수단과 시설로서 고대부터 1894년까지 사용되었다. 전국의 봉수망은 간선(幹線)인 5개의 직봉(直烽) 노선과 보조선인 간봉(間烽) 노선이 있었다. 직봉은 동북쪽에서 경흥, 동남쪽에서 동래, 서북쪽의 내륙 지방에서 강계, 해안 지방에서 의주, 서남쪽에서 순천을 그 기점으로 삼았으며, 종착점을 서울 목멱산(木覓山)[남산]으로 하였다. 간봉은 연변 봉수로부터 직봉선의 사이사이에 중간 역할을 하는 것과 연변 봉수에서 직접 본진(本鎭)이나 본읍(本邑)에 이르는 단거리의 것이 있다.
하동 지역의 봉수대는 두우산 봉수, 연대 봉수대, 하동 금오산 봉수대, 정안봉 봉수, 악양 봉수대가 남아 있다. 하동의 봉수대는 남해에서 내륙으로 이어지는 간봉 노선이었다. 두우산 봉수대와 연대 봉수대는 연변 봉수이고, 나머지 3곳은 내지 봉수에 해당하였다. 하동의 봉수는 남해에서 올라오는 봉수를 받아 직봉에 연결시켜 주거나 본읍(本邑)에 위급 상황을 알려 주는 기능을 하였다.
[학문과 사상]
하동은 유학의 고장으로서 많은 유학자들이 배출되었다. 15세기에는 지족당(知足堂) 조지서(趙之瑞)[1454~1504], 16세기에는 모산(茅山) 최기필(崔琦弼)[1562~1593], 겸재(謙齋) 하홍도(河弘度)[1593~1666], 17세기에는 낙와(樂窩) 하홍달(河弘達)[1603~1651], 삼함재(三緘齋) 김명겸(金命兼)[1635~1689], 설창(雪牕) 하철(河澈)[1635~1704], 양정재(養正齋) 하덕망(河德望)[1664~1743], 주담(珠潭) 김성운(金聖運)[1673~1730], 한계(寒溪) 하대명(河大明)[1691~1761], 괴전와(愧全窩) 하대관(河大觀)[1698~1776], 18세기에는 국헌(菊軒) 하달성(河達聖)[1734~1791], 중은(重隱) 강석좌(姜錫佐)[1777~1853], 19세기에는 월촌(月村) 하달홍(河達弘)[1809~1877], 간취당(澗翠堂) 정우빈(鄭瑀贇)[1823~1892], 효재(嘐齋) 정원항(鄭元恒)[1823~1905], 월고(月皐) 조성가(趙性家)[1824~1904], 계남(溪南) 최숙민(崔琡民)[1837~1905], 두산(斗山) 강병주(姜柄周)[1839~1909], 월산(月山) 조성주(趙性宙)[1841~1918], 니곡(尼谷) 하응로(河應魯)[1848~1916], 해사(海史) 정돈균(鄭敦均)[1855~1941], 석전(石田) 문진호(文晉鎬)[1860~1901], 수재(守齋) 정봉기(鄭鳳基)[1861~1915], 수당(修堂) 최경병(崔瓊秉)[1865~1939], 사와(士窩) 하재도(河載圖)[1869~1931], 신암(愼庵) 최긍민(崔兢敏)[1883~1970], 청천(晴川) 정기식(鄭基軾)[1884~1958], 담헌(澹軒) 하우선(河禹善)[1894~1975] 등이 있다.
이들을 학파별로 분류해 보면, 하수일, 하홍도, 허전, 하달홍, 허유, 김진호, 곽종석, 이승희, 하겸진 등 남명학파 및 남인 계열 학자의 문인이 11명이다. 그리고 노사 기정진의 문인이 조성가, 최숙민, 조성주, 최경병, 김기주 등 5명이다. 따라서 하동 지역은 남명학파 및 남인 계열이 대다수를 차지하며, 그 다음으로 노사학파의 문인이 많은 비중을 가진다 하겠다.
경상우도는 남인 계열의 학자가 월등히 우세한 위치에 있는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하동 지역에 기정진의 학문이 대를 이어 계승되고 있는 점은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그 이유는 하동이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전라도와 접경하여, 물길을 이용해 상호 간의 교통이 원활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에 하동은 남명학의 핵심 지역이라는 학문적 연원과 함께 노사 기정진의 학문을 새롭게 수용하여 학문적·학파적 다양성이 공존하는 특색을 가지게 되었다.
하동에는 하동향교와 옥산서원, 인천서원 등의 교육 시설과 하홍도 유적비, 하동 대곡리 조지서 묘비 등 유학자들의 묘비가 있다. 또한 하홍도의 문집인 『겸재집(謙齋集)』, 최숙민(崔琡民)의 문집인 『계남집(溪南集)』 등 여러 유학자들의 문집이 남아있으며, 정여창(鄭汝昌)이 학문을 강론하던 악양정과 하홍도의 강학소였던 모한재 등 조선 시대 유학자들의 발자취가 서린 유적 등이 현재에도 도처에 남아 있다.
[변혁운동]
17세기 이후 사회·경제적 변화 속에서 사회 변혁을 도모하거나 왕조를 부정하고 새 왕조 건설을 염원하는 세력들이 여러 가지 비기(祕記)·도참설(圖讖說)을 퍼뜨렸다. 지리산은 이상향인 청학동이 존재하는 곳으로 알려졌으므로 사회 변혁 세력들이 이상향을 실현할 곳으로서 주목하였다. 이에 하동에서는 정조 때『정감록』을 근거로 무귀천(無貴賤)의 세상을 꿈꾸는 역모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또한 하동부 관아에서 5리쯤 떨어진 두치장(斗峙場)에 괘서가 내걸려 “문무(文武)의 재예(才藝)가 있어도 권세가 없어 실업(失業)한 자는 나의 고취(鼓吹)에 응하고 나의 창의(倡義)에 따르라. 정승이 될 만한 자는 정승을 시킬 것이고 장수가 될 만한 자는 장수를 시킬 것이며, 가난한 자는 풍족하게 해주고 두려워하는 자는 숨겨 준다.”며 선동하기도 하였다. 조선 시대에 하동은 이처럼 영·호남 유학이 교류되고 꽃피는 지역이었으나 한편 이상향 지리산과 장시의 번성으로 도참설이나 괘서 등 민중의 변혁운동이 함께했던 지역이었다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