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4019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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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鳳基 |
영어음역 | Jeong Bonggi |
이칭/별칭 | 정효기(鄭孝基),응선(應善),회계(晦溪),수재(守齋)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 북평리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전병철 |
[정의]
개항기 하동 출신의 유학자.
[가계]
본관은 연일(延日). 초명은 정효기(鄭孝基), 자는 응선(應善). 호는 수재(守齋). 처음에는 호를 회계(晦溪)라 하였다가, 만년에 『논어(論語)』의 “목숨을 걸고 지키며 도를 선하게 한다[守死善道]”라는 구절에서 취하여 수재라 하였다. 고조할아버지는 송죽헌(松竹軒) 정도관(鄭道貫)이고, 증조할아버지는 청계(淸溪) 정국제(鄭國濟)이며, 할아버지는 통덕랑 정현채(鄭顯采)이다. 아버지는 증동몽교관(贈童蒙敎官) 정환우(鄭煥愚)이며, 어머니는 해주 정씨(海州鄭氏)이다.
아버지가 네 번 재취를 하였는데 교하 노씨(交河盧氏), 함창 김씨(咸昌金氏), 초계 정씨(草溪鄭氏), 해주 정씨이다. 교하 노씨와 함창 김씨는 자식이 없었으며, 초계 정씨와 해주 정씨는 각각 1남을 낳았는데, 초계 정씨가 낳은 아들은 군무아문주사(軍務衙門主事) 옥초(玉樵) 정철기(鄭喆基)이다. 부인은 통정대부 김성표(金聲杓)의 딸 상산 김씨(商山金氏)이며, 그 사이에 1남 1녀를 두었다.
[활동 사항]
정봉기(鄭鳳基)[1861~1915]는 어려서 부모의 상을 당하여 백형 정철기를 따르며 극진히 섬겼다. 약관의 나이에 영남감영(嶺南監營)에서 시행한 복시(覆試)에 응시하였는데, 시험을 담당하는 관리가 “어린 나이로 과거에 급제하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서 그가 몰래 떨어뜨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에 정봉기는 과거를 단념하고 위기지학(爲己之學)을 목표로 삼아 학문에 힘을 쏟았다. 당시에 명망이 있던 만성(晩醒) 박치복(朴致馥)[1824~1894], 계남(溪南) 최숙민(崔琡民)[1837~1905], 노백헌(老栢軒) 정재규(鄭載圭)[1843~1911], 물천(勿川) 김진호(金鎭祜)[1845~1908] 등이 정봉기가 학문에 전념하는 모습을 보고 칭찬을 하였으며, 월고(月皐) 조성가(趙性家)[1824~1904]는 그가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후손답다는 말로 격려하였다.
1888년(고종 25)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1836~1905]이 경상남도 지역에 왔을 때 찾아가 제자의 예를 행하였으며, 또한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1833~1906]을 찾아가 뵙고 집지(執贄)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정봉기는 노론의 정통 학맥을 이은 송병선과 최익현을 스승으로 섬기며 학통을 계승하였다.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책을 싸서 지리산의 절로 들어갔는데, 조카 정한용(鄭瀚鎔)이 진주성(晉州城)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동참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관군과 싸울 수 없다고 판단하여 결국 의병을 해산하였다. 매천(梅泉) 황현(黃玹)[1855~1910]의 절명시(絶命詩)를 듣고서 비분한 마음을 함께하였으며, 시를 지어 사간(司諫) 이택환(李宅煥)에게 보내 자신의 뜻을 드러내 보이기도 하였다.
[학문과 저술]
1903년(고종 40) 만동묘(萬東廟)에 헌관(獻官)으로 참례하였으며, 제례를 마친 후 그곳의 제생들과 함께 강학을 행하였다. 이후 포은 정몽주의 유상(遺像)을 모신 하동군 옥종면 동곡(桐谷)의 의재(義齋)로 거처를 옮겨 『심경(心經)』, 『근사록(近思錄)』, 『주자서(朱子書)』 등의 책을 깊이 연구하고 심신을 수양하였다.
저서로 문집 10권 5책 『수재문집(守齋文集)』이 있다. 선조의 자취를 보존하기 위해 포은의 문집을 보완하여 옥산재(玉山齋)에서 중간하였으며, 설곡(雪谷) 정보(鄭保)가 거주한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문태(文泰)에 유허비를 세웠다. 그리고 선조의 유문(遺文)과 행적을 수습하여 『세덕편(世德編)』을 편찬하였다.
[묘소]
묘소는 하동군 북천면 양천리 회동(回洞)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