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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401429
한자 趙性家
영어음역 Jo Seongga
이칭/별칭 직교(直敎),월고(月皐)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 회신리
시대 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
집필자 최석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24년연표보기
활동 시기/일시 1883년연표보기
활동 시기/일시 1902년연표보기
몰년 시기/일시 1904년연표보기
출생지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 회신리 지도보기
묘소|단소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 회산
사당|배향지 전라남도 장성군 진원면
성격 학자
성별
본관 함안

[정의]

조선 후기 및 개항기에 활동했던 하동 출신의 학자.

[가계]

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직교(直敎), 호는 월고(月皐)이다. 함안 조씨는 고려 시대 대장군을 지낸 조정(趙鼎)을 시조로 한다. 조선 전기 단종 때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알려진 어계(漁溪) 조려(趙旅)[1420~1489]의 후손이다. 고조할아버지는 조원기(趙元耆)이고, 증조할아버지는 조경진(趙經鎭)이다. 증조할아버지 대에 진주 월횡리로 이주하여 정착하였다. 할아버지는 조오(趙澳)이고, 아버지는 조광식(趙匡植)으로 동몽교관에 추증되었는데, 인자하고 은혜롭고 근면하고 검소하여 가업을 일으켰다. 어머니는 김석신(金錫信)의 딸인 김해 김씨이다.

조성가(趙性家)[1824~1904]는 1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조종규(趙宗奎)로 의금부도사를 지냈고, 딸은 권봉현(權鳳鉉)에게 시집갔다. 조종규는 아들 둘을 두었으며, 큰아들은 조용숙(趙鏞肅)이고, 둘째 아들은 조용우(趙鏞禹)이다.

[활동 사항]

조성가는 1824년(순조 24) 2월 16일 회산(檜山)[현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 회신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견해와 발언이 어른들보다 나은 경우도 있었다. 약관의 나이에 제자백가의 글을 섭렵하였고, 문장은 간결하면서도 예스러웠으며, 시속의 말을 익히지 않았다. 월봉(月峯) 아래에 살았기 때문에 ‘월고’라고 스스로 호를 지었다.

조성가의 활동 사항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취수정(取水亭) 등에서 학생들을 가르친 것이다. 취수정은 집의 동쪽 시냇가에 있었는데, 배우러 찾아오는 학생들이 문에 가득하였다. 당시 조성가는 학규가 구비되지 않은 것을 병통으로 여겨 강규(講規)를 정하였다. 봄가을 두 차례 만나 서로 읍을 하고 서책을 강론한 뒤 질의하고 난해한 곳을 논변하고서 향음주례를 행하는 것이었다. 이 강규를 ‘분서강약(汾西講約)’이라고 명명하고 취수정에 비치하였다.

1893년(고종 30) 진주목사가 경상도관찰사의 지휘를 받아 강약(講約)을 개설할 적에 간절히 청하여 조성가를 도약장(都約長)으로 삼았다. 그리고 학행이 있는 고을 자제들을 선발하여 강학하고 봄가을로 향교에 모여 함께 강학하도록 하였는데, 이는 모두 도약장이 주관하였다. 또 많은 유생들의 청으로 여러 곳에 가서 강의를 하였는데, 단성의 신안사(新安社)와 삼가의 관선당(觀善堂)이 가장 성대했다.

둘째는 지역 선현들의 문집을 간행하고 묘비를 세우는 등 문화 사업에 적극 참여하여 활동한 점이다. 조성가는 『남명집(南冥集)』 중간에 참가하였고,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남명선생신도비명’을 세우는 일을 주선하였으며, 환성재(喚醒齋) 하락(河洛)의 문집을 교정하고 간행하는 일에도 참여하였다.

셋째는 지역의 풍속을 순화시키고 문화를 발전시키는 일에 적극 참여하였다는 점이다. 1877년(고종 14) 성주에 살던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이 사월리(沙月里)[일명 남사마을]에 내려오자 이 지역 남인계 학자들이 모여 강회를 갖고 향음주례를 거행하려 하며 조성가를 초청하였다. 조성가는 그 모임에 기꺼이 참석하여 강론을 하고 함께 예를 행하였다.

1883년(고종 20) 도에서 ‘경학(經學)’으로 천거하여 선공감가감역에 제수되었다. 1896년 삭발령이 내리자 그는 죽을지언정 상투를 자를 수 없다고 항거하였다. 1902년(고종 39) 기로사(耆老社)에 들어가고 정3품 통정대부에 올랐다. 1904년(고종 41) 6월 6일 집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 81세였다.

[학문과 저술]

조성가의 학문은 스승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의 주리설(主理說)을 그대로 따르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28세 때 기정진이 호남에서 우뚝하게 일어나 성현의 도를 얻었다는 말을 듣고서 곧바로 3백 리 길을 걸어가 제자가 되었다. 기정진은 자신이 지은 「외필(畏筆)」을 조성가에게 주었는데, 이를 두고 기정진이 자신의 도를 조성가에게 물려 준 것으로 보기도 한다.

조성가는 경설(經說)에 대해 깊이 음미할 뿐 저술을 하려 하지 않았다. 그것은 해석이 많으면 도리어 도를 해치고 논쟁을 일으킨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는 “주자 이후 경술이 크게 밝아졌으니, 말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알기가 어렵고, 알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행하기가 어렵다. 또한 도는 내 몸으로 마땅히 행해야 할 길이고, 내 마음에 갖추어진 바의 이치이다. 만약 마음으로 터득한 것을 몸으로 행하기를 힘쓰지 않고 단지 입으로만 말하여 지혜와 능력을 자랑하는 자료로 삼는다면 그것은 위기지학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이를 통해, 조성가의 학문 정신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알 수 있으며, 특히 남명학의 실천을 중시하는 성향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음을 파악할 수 있다.

저서로 20권 10책의 『월고집(月皐集)』이 있다. 일제가 조선을 침략하는 현실을 목격하고 그 슬픔과 탄식을 왕왕 시로 표현하기도 했으며, 그의 「부정척사론(扶正斥邪論)」은 외세에 대한 저항이기도 하였다.

[묘소]

거처하던 산기슭에 장사지냈다가 뒤에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 회산(檜山) 을좌(乙坐) 언덕에 부인 성산 이씨와 합장하였다.

[상훈과 추모]

권재규(權載圭)가 행장을 지었다. 전라남도 장성군 진원면에 있는 노사 기정진을 모신 고산서원(高山書院)에 배향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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