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4014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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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崔淑民 |
영어음역 | Choe Sukmin |
이칭/별칭 | 최유민(崔有民),원칙(元則),치장(穉章),계남(溪南)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상남도 하동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 |
집필자 | 최석기 |
출생 시기/일시 | 1837년 3월 16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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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년 시기/일시 | 1905 11월 28일 |
묘소|단소 |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 두양리 양천마을 |
성격 | 학자 |
성별 | 남 |
본관 | 전주 |
[정의]
조선 후기와 개항기 하동 지역에서 활동한 학자.
[가계]
본관은 전주(全州). 처음의 자는 원칙(元則)이었으나 뒤에 이름을 바꾸면서 치장(穉章)이라 했으나 처음의 자가 널리 알려져 그대로 썼다. 호는 계남(溪南), 초명은 최유민(崔有民). 전주 최씨는 최아(崔阿)를 시조로 삼는데, 그의 아들 최용생(崔龍生)이 경상도안찰사로서 원나라 사신에게 미움을 받아 사천(泗川)에 거주하면서부터 경상도에 전주 최씨가 살게 되었다.
최숙민(崔琡民)의 가계는 8대조 모산공(茅山公) 최기필(崔琦弼)을 파조로 하여 ‘모산공파’라고 한다. 최기필은 1593년(선조 26) 진주성 2차 전투 때 가솔 60여 명을 거느리고 진주성에 들어가 병사 최경회와 함께 싸우다 순절하여 창렬사(彰烈祠)에 제향되었다.
7대조 할아버지는 명나라가 망하자 스스로 자신의 호를 ‘대명처사(大明處士)’라고 한 최익(崔瀷)이다. 아버지는 최중길(崔重吉)이고, 어머니는 하덕망(河德望)의 손녀로 진양 하씨(晉陽河氏)이다. 부인은 권사길(權思吉)의 딸인 안동 권씨(安東權氏)이다. 1남 4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최제효(崔濟斅)이고, 딸은 권재순(權載純)·박해봉(朴海奉)·권태용(權泰容)·정홍규(鄭洪圭)에게 시집갔다.
[활동 사항]
1. 기정진에게 수학
최숙민은 1837년 3월 16일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비범하여 성년이 되기도 전에 경전과 역사서를 대략 섭렵하였다. 20세 때 과거 시험에 응시하여 한양에 갔는데, 선비들의 풍속이 예전 같지 않은 것을 보고서 과거를 보지 않고 귀향하였다. 그 뒤 과거를 단념하고 위기지학(爲己之學)에 전념하였다. 몇 년 동안 독학을 하다가 스승을 구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명유(名儒)들을 두루 방문했다. 그리고 당색은 다르지만 기정진(奇正鎭)의 문하생이 되었다. 그는 뒤에 김평묵(金平默)·최익현(崔益鉉) 등 화서학파 학자들과 교유하였다.
2. 계남정에서의 강학과 삭발령 반대
최숙민의 활동은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는 『진양지(晉陽誌)』 인물 조에 기술되어 있듯이, 유학의 도가 무너져 가는 시대에 후생을 장려하고 진취시키는 교육을 자신의 책임으로 여겼다는 점이다. 그는 계남정(溪南亭)에서 강학한 것은 물론, 인근 지역의 강회에 참석해서 강의를 하기도 하였다. 산청의 강약(講約)은 권운환(權雲煥)이 청해 강의를 부탁하였고, 산천재의 강규(講規)는 최숙민이 남명의 후손들을 위해 만든 것이다. 또 정의림(鄭義林)과 구례 종산(鍾山)에서 모여 강학하기로 약속하였고, 뇌룡정·신안사(新安社)에서도 강의하였다. 그리하여 이름이 나서 경전을 들고 배우러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둘째는 유교의 도를 목숨보다 더 소중하게 생각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지키려 했다는 점이다. 1896년(고종 33) 삭발령이 내렸을 때 “부모가 온전히 낳아 준 신체를 훼손하면 자식이 아니다. 선왕이 대대로 지키던 법복을 바꾸면 사람이 아니다. 자식이 아니면 적일 뿐이고, 사람이 아니면 짐승일 뿐이다.”라고 하면서 죽을지언정 삭발을 할 수 없다고 항거하였다. 한글로 글을 지어 무지한 백성들에게도 그 사실을 깨우쳐 주므로 백성들이 삭발령을 따르지 않자, 단성현감은 최숙민이 그가 사주한 일로 여겨 해를 끼치려 하였다. 이는 노사학파 학자들에게서 한결같이 나타나는 도를 지키려고 하는 시대적 위기의식이었다.
말년에 자옥산(紫玉山) 남쪽 골짜기에 서당을 짓고 머물며 강학하다 1905년 11월 28일 신시에 69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학문과 저술]
최숙민의 성리사상은 스승 기정진의 주리설을 계승하여 그와 같은 맥락에서 전개되었다. 그런데 최숙민은 경상우도 지역에 살면서 자연스럽게 남명학의 실천을 중시하는 학문 성향을 체득하였고, 또 그가 살던 시대가 유학의 도가 없어져 가는 절망의 시대였기 때문에 특히 도덕적 실천을 중시하는 학문 성향을 보이고 있다. 그는 약관의 나이가 되기도 전에 구도의 마음을 가졌다. 그래서 안회(顔回)처럼 존심양성(存心養性)하는 데 뜻을 두었고, 학문은 증자(曾子)처럼 성찰을 중시하였다. 그는 이처럼 실천을 중시하는 성향을 가지면서도 궁리(窮理)를 소홀히 하지 않아 거경(居敬)과 궁리를 상수(相須)해야 한다고 하였다.
최숙민은 스승 기정진으로부터 『논어(論語)』를 열심히 읽으라는 말을 듣고 4년 동안 읽어서 『논어』에 대해 박학하였다. 그리고 문명사회를 건설하느냐 미개한 사회로 전락하느냐 하는 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하여 이(夷)를 배격하고 화(華)를 존숭하였으며, 인륜의 도를 따르는 인간이 되느냐 아니면 짐승처럼 사느냐 하는 문제를 중시하여 서양 문물을 오랑캐와 금수로 보아 배척하였다. 이는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보수적인 사상이라 할 수 있지만, 그에게는 춘추대의의 의리 정신이었다. 그래서 금수가 아닌 인간을, 오랑캐가 아닌 중화 문명을 지향하였다. 30권 10책의 『계남집(溪南集)』이 있다.
[묘소]
처음에는 서당 우측에 장사지냈다가 1909년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 두양리 양천마을 동쪽 간좌(艮坐) 언덕에 이장하였다.
[상훈과 추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