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401299 |
---|---|
한자 | 趙之瑞 |
영어음역 | Jo Jiseo |
이칭/별칭 | 백부(伯符),지족당(知足堂),충헌(忠軒)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전병철 |
출생 시기/일시 | 1454년 |
---|---|
활동 시기/일시 | 1474년 |
활동 시기/일시 | 1479년 |
몰년 시기/일시 | 1504년 |
추모 시기/일시 | 1506년 |
출생지 |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 |
묘소|단소 |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 대곡리 614-2 |
사당|배향지 | 경상남도 진주시 집현면 신당리 |
성격 | 관인 |
성별 | 남 |
본관 | 임천 |
대표 관직 | 세자시강원보덕 |
[정의]
조선 전기 하동 출신의 관인(官人).
[가계]
본관은 임천(林川). 자는 백부(伯符), 호는 지족당(知足堂)·충헌(忠軒). 5대조 할아버지는 문하지후(門下祗侯) 조순(趙淳)이며, 고조할아버지는 문하시중을 지내고 가흥백(嘉興伯)에 봉해진 조석견(趙石堅)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전중(殿中) 조익(趙益)이며, 할아버지는 사온시 직장(司醞寺直長) 조민원(趙敏原)이다. 아버지는 사헌부 감찰을 지낸 조찬(趙璨)이며, 어머니는 생원 정삼(鄭參)의 딸이다. 전처는 사정(司正) 정보민(鄭保民)의 딸인 해주 정씨(海州鄭氏)이며, 후처는 생원 정윤관(鄭允寬)의 딸인 연일 정씨(延日鄭氏)이다.
갑자사화 이후 후처 연일 정씨는 성을 쌓는 일에 복역했다가 초야를 떠돌았는데, 당시 아들 조침(趙琛)은 포대기에 있었고 조리(趙理)는 뱃속에 있었으나 손수 나무열매를 주워 오지사발에 삶아서 아침저녁으로 제전(祭奠)을 올렸다. 이에 중종 조에 정려문을 세워 포상하였으니 하동 대곡리 오천 정씨 정려각이 그것이다. 맏아들 조정(趙珵)은 금부의 옥사에서 두 번이나 고문을 당해 거의 죽을 뻔하다가 살아남아 남해로 귀양을 갔고, 중종 조에 신원되어 군자감참봉에 제수되었다.
[활동 사항]
조지서(趙之瑞)는 1454년(단종 2) 지금의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에서 태어났다. 1474년(성종 5) 생원시에 1등으로 합격하고 진사시에 2등으로 합격하였으며, 이어서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에 임명되었다. 1479년(성종 10) 다시 중시(重試)에 1등으로 합격하여 형조 정랑을 제수 받고 홍문관 교리와 응교를 역임하였다. 세자시강원의 필선(弼善)과 보덕(輔德)으로 연산군의 스승이 되었으며, 연산군이 즉위하자 감당할 수 없을 것임을 알고 창원부사의 자리를 청하여 외직으로 나갔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사직하고 고향인 옥종 동곡(桐谷)으로 돌아왔다.
연산군은 세자로 있을 때 조지서의 풍간(諷諫)과 집요한 진강(進講)을 혐오하였는데,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를 일으키고는 그를 연루해 참형에 처하였다. 참형을 당한 조지서의 시신은 저잣거리에 내걸렸다가 강물에 던져졌다.
[학문과 저술]
『동문선(東文選)』에 「언심견투(彦深見投)」라는 제목의 시 한 수가 수록되어 전한다.
수좌청소수루첨(愁坐淸宵數漏籤)[맑은 밤에 근심스레 앉아 누첨을 세이리라]
조래권만대산첨(朝來捲幔對山尖)[아침에 장막을 걷고 산꼭대기를 마주한다]
앵함만색제심수(鶯銜晩色啼深樹)[꾀꼬리는 새벽빛을 띠고 깊은 나무에서 우는데]
연략경음입단첨(燕掠輕陰入短簷)[제비는 엷은 그늘을 스쳐 짧은 처마에 든다]
와온정인신관라(臥穩正因身慣懶)[누워야 편안한 것은 진실로 몸이 게으른데 습관되었기 때문이요]
가빈비시아위렴(家貧非是我爲廉)[집이 가난하나 내가 청렴한 까닭이 아니다]
평생장지소마진(平生壯志消磨盡)[평생의 장한 뜻이 모두 다 사그라졌거니]
수파릉화조로염(羞把菱花照老髯)[거울을 들고 늙은 수염을 비추기 부끄럽네]
[묘소]
묘소는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 대곡리 614-2번지에 있다.
[상훈과 추모]
성종 때 청백리로 뽑혔다. 1506년(연산군 12)에 일어난 중종반정 이후 통정대부 승정원 도승지(承政院都承旨)에 추증되었다. 경상남도 진주시 집현면 신당리에 있는 신당서원(新塘書院)에 제향되었으며, 1550년대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하동 대곡리 조지서 묘비[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458호] 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