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4017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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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謙齋集 |
영어음역 | Gyeomjaejip |
영어의미역 | Collected Works of Gyeomjae |
이칭/별칭 | 『겸재문집』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문헌/전적 |
지역 | 경상남도 하동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상필 |
[정의]
조선 중기 경상남도 하동 출신의 문인 하홍도의 문집.
[저자]
하홍도(河弘度)[1593~1666]의 본관은 진주(晉州)이며. 자는 중원(重遠), 호는 겸재(謙齋)이다. 인조반정 이후 남명학파(南冥學派)를 주도했던 인물이다. 인조반정 이후 벼슬에 추천을 받았으나 사퇴하고 깊은 산속에 머물며 정자를 지어 영귀대(詠歸臺)라 하고 학문에 힘썼다. 남명(南冥) 조식(曺植) 사후에 남명학파가 약 50년 동안 조야에서 크게 활약하다가, 1623년 인조반정 이후 급격히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하홍도는 조식의 사숙인으로서 남명학파가 쇠퇴의 길로 접어드는 시기에 중심을 잡은 역할을 한 인물이다. 특히 그는 남명의 문인 가운데 한강(寒岡) 정구(鄭逑)[1543~1620], 내암(來菴) 정인홍(鄭仁弘)[1535~1623] 등의 제자들을 이끌고 남인화하기에 이른다. 이후 남명학파의 일부가 서인화하기도 하였으나, 남명학파를 주도한 인물들은 대체로 남인들이었다 할 수 있다.
[편찬/간행 경위]
초간본은 증손자 하대관(河大觀)과 종증손자 하대명(河大明)이 하홍도의 시문을 수집 편차하고, 유고(遺稿) 및 연보(年譜)와 부록을 합하여 6책으로 편정하였다. 1739년(영조 15)에 김성탁(金聖鐸)에게 교감(校勘)을 부탁하고 아울러 서문을 청하였다. 당시 김성탁은 이현일(李玄逸)의 신원(伸寃)을 청하는 소(疏)를 올렸다가 죄를 입어 광양현(光陽縣)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었기에 사양했으나 마침내 연보를 교감하고 서문을 지었다. 연보 교정은 김성탁이, 문집 교정은 오광운(吳光運)이 했다. 정확한 문집 간행 연대는 알 수 없고, 1758년경으로 추정한다. 초간본은 현재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국립중앙도서관에도 목록과 별집(別集) 1책이 소장되어 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는 저자의 문집에 정인홍(鄭仁弘), 이이첨(李爾瞻), 이현일 등에 대한 기록이 많다는 이유로 1779년(정조 3)에 유생(儒生) 박동구(朴東龜), 이태빈(李泰彬) 등이 상소하여 문집을 불사르자고 청한 내용이 들어 있는데, 이것은 문집의 잔존본을 없애자는 상소였던 듯하며, 이런 사실로 보면, 당시 저자의 문집은 거의 유포되지 못했으리라 짐작된다.
『운석유고(雲石遺稿)』[조인영(趙寅永)의 문집] 권15에는 “하대관의 조부인 하홍도는 영남 사람들의 숭앙을 받는 자로서 그 선조인 하연(河演)의 서원에 배향되었다. 하대관이 그 유문(遺文)을 간행하였는데, 정론(正論)을 비판하고 악인(惡人)을 장려하여 어그러진 말이 많이 들어 있었다. 부군(府君)[조인영의 조부인 조엄(趙曮)]이 서원에서 출향(黜享)시키고 그 책을 불태우고 하대관을 형배(刑配)하였다.”라는 말이 들어 있다. 이로 미루어볼 때, 문집이 간행된 이후 오래지 않아 경상도관찰사 조엄에 의해서 훼서된 것으로 보인다. 곽종석(郭鍾錫)이 지은 중간본 발문에도 저자의 문집이 활자로 간행된 적이 있다는 간략한 내용만 언급하고 있다.
이렇게 초간본이 널리 유포되지 못하자 저자의 유문이 민멸될 것을 우려한 영남의 사림들이 1900년대 초에 저자의 별업(別業)이었던 모한재(慕寒齋)에 모여 문집을 다시 간행할 것을 결정하고 간행 경비를 마련하여 저자의 후손 하성로(河性魯)를 도와 간역(刊役)을 시작하였다. 10년이 지난 1912년에 목판 판각이 완성되었으며, 곽종석의 발문을 더하여 중간본을 간행하였다. 중간본은 국립중앙도서관, 성균관대학교 중앙도서관,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형태/서지]
『겸재집(謙齋集)』은 한적(漢籍) 목판(木版) 선장본(線裝本)[실로 묶어 제본한 책]으로, 12권 6책으로 되어 있다. 표제는 겸재선생문집(謙齋先生文集)이고 판심제는 겸재선생문집(謙齋先生文集)이다. 책의 크기는 가로 20.8㎝, 세로 30.0㎝이다.
[구성/내용]
1. 초간본
초간본은 목록, 별집, 원집 12권 합 6책으로 이루어져 있다. 권두에 1751년에 이익(李瀷)이 쓴 서(序)와 1740년경에 김성탁이 쓴 서(序)가 있고 이어서 원집 목록이 있다. 목록 다음에는 별집으로 사우문도록(師友門徒錄)이 실려 있다. 이것은 저자와 친교가 있었던 100여 명의 사우(師友)와 문인(門人)들에 대한 기록이다.
권1~2는 250여 제(題)의 시(詩)가 시체별(詩體別)로 실려 있고, 10편의 부(賦), 4편의 애사(哀辭)가 들어 있다. 내용은 덕천서원(德川書院)에 관한 시, 조식의 운(韻)에 차운(次韻)한 것이 많으며 만시(挽詩)의 비중이 상당히 높다. 권3~6은 서(書)이다. 신석번(申碩蕃), 성호정(成好正), 하진(河溍), 강대수(姜大遂), 허목(許穆), 조진명(曺晉明) 등 당대의 문인 사우들과 주고받은 편지이다. 특히 권6에는 향교의 위패 배치에 대한 문목(問目), 상복(喪服)에 대한 문목 및 복제(服制)를 논한 글들이 실려 있다. 6권말에는 정장(呈狀) 2편이 실려 있다.
권7은 제문(祭文)과 소(疏)이다. 조식, 박문영(朴文楧), 이유열(李惟說), 성여신(成汝信), 정온(鄭蘊), 도산서원(道山書院), 도천사(道川祠), 용연사(龍淵祠), 덕천서원(德川書院), 서계서원(西溪書院) 등에 대한 제문(祭文), 봉안문(奉安文), 배향문(配享文), 상향축(常享祝) 등이 실려 있다. 소(疏) 1편은 「사은겸진군도구사소(謝恩兼陳君道九事疏)」인데, 1662년(현종 3)에 조정에서 쌀과 콩을 하사하자 사은을 하면서 아울러 군도(君道) 9조목을 진달한 것이다. 권8은 묘표(墓表), 묘명(墓銘), 묘갈명(墓碣銘), 유애비(遺愛碑), 명(銘), 행장(行狀) 등이다. 행장은 하수일(河受一), 하진(河溍)에 대한 것이다.
권9~10은 상량문(上樑文), 창의문(倡義文), 서(序), 발(跋), 기(記), 설(說), 잡저(雜著)이다. 「정묘호란창의문(丁卯胡亂倡義文)」, 「연구속선서(聯句續選序)」 등이 있다. 「연구속선서」는 아동용 한시(漢詩) 교육 교재인 「백련초(百聯抄)」의 단점을 보완하여 「연구속선(聯句續選)」을 만들고 그 책에 대해서 서문을 쓴 것이다. 권11~12는 부록인데, 권11에는 허목이 지은 묘갈, 이익이 지은 묘지명, 이현일이 지은 행장 등이 실려 있으며, 권12에는 당시 문인 사우들이 지은 제문, 만사(挽詞)와 행록(行錄)이 실려 있다.
2. 중간본
중간본은 초간본과는 편차가 전혀 다르다. 초간본에는 시(詩)를 시체별로 배열하였으나, 중간본은 시대 순으로 배열하였으며, 초간본에 없던 연보를 중간본에는 부록 첫머리에 두었다. 초간본에는 사우문도록(師友門徒錄)이 별집으로 권두에 실려 있는데 중간본에는 권미 부록의 끝에 실려 있다. 서(書) 등의 인물 배열 순서 및 기타 작품의 분류 기준도 초간본과 다르다.
중간본은 원집 9권, 부록 4권 합 6책이다. 책머리에 이익과 김성탁의 서문이 있다. 원집 권1~3은 부(賦) 4편, 사(辭) 1편, 시(詩) 190여 제(題)이다. 시는 권2의 후반부터는 대부분이 만시(挽詩)이다. 권4~6은 소(疏) 1편, 정장(呈狀) 2편, 서(書) 100여 편, 잡저(雜著) 12편이다. 서(書)는 인물별로 배열되어 있는데, 인물의 순서는 초간본과 다르다. 권7은 서발(序跋) 13편, 명(銘) 2편, 비문 2편, 묘갈 6편이다. 부록은 연보 및 저자에 대한 묘도 문자(墓道文字)들이다. 권1이 연보이고, 권2는 포유문(褒諭文), 만사(挽詞), 제문이며, 권3은 행록(行錄), 행장, 묘갈, 묘지(墓誌), 상량문, 봉안문(奉安文), 상향문(常享文) 및 「모한재기(慕寒齋記)」, 「삼조예빙록후식(三朝禮聘錄後識)」 등이며, 권4는 사우문도록이다.
[의의와 평가]
『겸재집』은 ‘남명 이후 제1인자’로 불리는 하홍도의 문집이라는 점에서, 남명학파를 연구하고 이해하는 데 있어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자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