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4013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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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崔琦弼 |
영어음역 | Choe Gipil |
이칭/별칭 | 규중(圭仲),모산(茅山)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남도 하동군 북천면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전병철 |
출생 시기/일시 | 156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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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년 시기/일시 | 1593년 |
출생지 | 경상남도 하동군 북천면 |
성격 | 의사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진주목판관 |
[정의]
조선 시대 하동 출신의 의사(義士).
[개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규중(圭仲), 호는 모산(茅山). 아버지는 최정(崔涏)이다.
[활동 사항]
최기필(崔琦弼)은 1562년(명종 17) 지금의 경상남도 하동군 북천면에서 태어났다. 천성이 어질고 품행이 반듯하여 지방관의 추천을 받아 참봉이 되었으며, 사옹원봉사·진주목판관 등을 역임하였다. 이후 벼슬을 그만두고 진주 서쪽 백운동(白雲洞)에 초당(草堂)을 짓고서 학문과 강학에 힘을 쏟았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최기필은 “왜적에 대항하고 나라를 구하자”는 대의(大義)를 주창하며 관군과 의병의 항쟁을 지원하였다. 이듬해 적군이 후퇴할 무렵,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등이 진주에서의 패전을 복수하려고 많은 군사를 이끌고 진주로 집결하여 진주성이 위태로워졌다.
이에 최기필은 60여 명의 가솔을 이끌고 진주성 안으로 들어가 여러 장수들과 함께 합심하여 목숨을 걸고 싸웠다. 그러나 그 해 6월 진주성이 함락되자 최기필은, “살아서 나라에 공을 보답하지 못하였으니 죽어서 장차 어디를 떠도는 고혼(孤魂)이 될 것인가.”라고 말하고는 북쪽을 향해 사배(四拜)를 올린 후 남강에 몸을 던져 순국하였다.
[저술 및 작품]
『모산실기(茅山實記)』 3권 1책이 전한다.
[묘소]
후손이 최기필의 의관(衣冠)을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 두양리에 안장하였다.
[상훈과 추모]
병조참의에 증직되고 창렬사(彰烈祠)에 제향되었다. 지역 유림이 하동군 북천면 서황리에 경현사(景賢祠)를 건립하여 봉안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