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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401111
한자 義兵
영어의미역 Righteous Army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남도 하동군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김준형

[정의]

1894년에서 1909년 사이 하동 지역에서 일제의 침략에 맞서 싸우기 위해 나섰던 자위군.

[개설]

의병은 대한제국 말기 일본의 침략으로부터 국권을 수호하기 위해 일어난 보수 유생층과 평민·장교·병사 등이 주도한 무력 투쟁을 일컫는다.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계기로 처음 일어난 의병 투쟁은 1905년 을사조약 체결을 계기로 더욱 격화되면서 평민 출신 의병장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특히 1907년 군대 해산 이후 전문적으로 군사 훈련을 받은 군인들이 의병 투쟁에 가담하면서 투쟁의 수준이 더욱 높아졌다. 그러나 일제의 심한 탄압으로 대규모 의병 부대를 동원하는 것에서 소규모의 게릴라 전략을 구사하는 형태로 전략이 변모되어 갔다.

[활동 사항]

개항기 하동 지역에서는 의병 부대의 활동이 활발하였다. 호남 출신 고광순(高光洵)과 호서 출신 김동신(金東臣)이 이끄는 의병 부대는 하동군의 화개면 등 주로 지리산을 중심으로 호남과 영남 지역을 넘나들었다. 게릴라전으로 일본군과 격전을 벌이고, 또 일본과 관련된 기관과 인물을 징벌하기도 하였다.

하동 출신 의병장들의 활동도 활발하였다. 주도적 인물로는 박매지(朴每之)·임봉구(任鳳九)·이성로(李成魯)·우수보(禹守甫)·김의홍(金義洪)·조기섭(趙奇攝)·손몽상(孫夢尙)·박홍지(朴弘之)·이백응(李百應)·김대수(金大守) 등이 있다. 특히 박매지·임봉구 등이 이끄는 하동 의병대는 1907년 8월경 구례 연곡사에 있던 고광순 의병 부대와 합류하여 화개장터와 연곡사 등지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이들은 12월 이후 독자적으로 악양면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거나 하동 수비대를 습격하였고, 일진회원을 처단하기도 하였다. 박매지는 1909년 10월 진주 대평면 전투에서 체포되어 총살을 당했다.

임봉구 의병 부대는 1908년 7월 24일 하동군 양보에 있는 일어 학교를 방화하여 전소시키고, 25일에는 횡천면 토덕동에서 일진회원 장재수를 사살하였다. 7월 26일에는 일본 경찰과 교전하다가 임봉구가 체포되었다. 9월경 이성로의 의병 부대는 일진회원 김성신을 사살하고 악양에서 친일파의 집 여섯 채를 방화하였다. 또 우수보의 의병 부대도 9월 17일 일본인 첩자 쓰다 만끼지를 사살하고 일본군 18명을 사살하였다. 10월 5일 손몽상조기섭이 이끄는 의병 부대는 청암면 안양리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다 손몽상·조기섭이 체포되어 일본 수비대에 의해 총살을 당했다.

이외에도 청암면·옥종면·악양면 등지에서 의병과 일본군 간의 전투가 여러 차례 벌어졌다. 위와 같은 전투로 인해 1907~1908년 사이 하동 지역 의병 1,500여 명 중 157명이 전사하고 수백 명이 부상당해 그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경상남도 지방 의병 활동에서 숫자와 교전 회수의 80% 이상이 지리산을 근거지로 한 것이었고, 따라서 하동이 경상남도 지방에서는 의병 투쟁의 중심지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악양면 정동리 취간림에는 구한말 및 일제 강점기에 지리산 일대에서 일본군과 싸우다 순국한 3,000여 명의 의병 및 항일 독립투사의 넋을 기리고 활약상을 기념하는 악양 항일 투사 기념탑[악양 항일투사 추모탑비]이 있다. 또한 13기의 개인비가 있어 김의홍(金義洪)·손몽상(孫蒙尙)·조기섭(趙奇攝)·박홍지(朴弘之)·박매지(朴每之)·임봉구 등 순국 의병장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화개면 의신마을에는 하동군과 경남독림운동연구소가 복원한 무명 항일투사 30인 무덤이 있다. 이는 1908년 지리산 일대에서 활약하다 설을 보내려 마을로 내려왔다가 일본군의 공격을 받고 순국한 의병들의 무덤이다. 그간 관리가 되지않아 봉분의 형체를 알기 힘들 정도였는데, 2011년복원되어 하동 의병의 활약상을 알려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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