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4019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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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瑀贇 |
영어음역 | Jeong Ubin |
이칭/별칭 | 주범(周範),간취당(澗翠堂)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상남도 하동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 |
집필자 | 전병철 |
[정의]
개항기 하동 출신의 유학자.
[가계]
본관은 진양(晉陽). 자는 주범(周範), 호는 간취당(澗翠堂). ‘간취당(澗翠堂)’이라는 당호는 오대(五代) 말 북송 초의 학자인 범질(范質)[911~964]이 지은 시에서 “더디게 자라는 시냇가의 소나무, 늦게까지 푸르른 빛 머금고 있네[遲遲澗畔松 鬱鬱含晩翠]”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으로, 오래도록 절개를 변치 않겠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9대조 낙진헌(樂眞軒) 정인평(鄭仁平)은 구암(龜巖) 이정(李楨)[1512~1571]을 좇아 배웠으며, 8대조 석정(石亭) 정홍조(鄭弘祚)[1534~1590]는 수우당(守愚堂) 최영경(崔永慶)[1529~1590]의 제자이다. 정홍조는 스승이 기축옥사(己丑獄事)에 연루되어 모함을 당하자 신원(伸寃)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하였으며, 사후에 지역 유림이 그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하동군 옥종면 북방리 신촌마을에 덕원서원(德源書院)을 지어 제향을 올렸다.
고조할아버지는 정민서(鄭敏瑞)이고, 증조할아버지는 정재웅(鄭再雄)이며, 할아버지는 정완(鄭梡)이다. 아버지는 정지중(鄭志中)이며, 어머니는 강계봉(姜桂鳳)의 딸 진양 강씨(晉陽姜氏)와 최계태(崔啓泰)의 딸 삭녕 최씨(朔寧崔氏)이다. 정우빈은 삭녕 최씨의 소생이다. 부인은 조중식(趙中植)의 딸인 함안 조씨(咸安趙氏)이며, 그 사이에 1남 3녀를 두었다.
[활동 사항]
정우빈(鄭瑀贇)[1823~1892]은 어릴 적부터 공부하기를 좋아하였다. 9세 때 『소학(小學)』 경신편(敬身篇)을 배우다가 탄식하면서 “이 내용은 어찌 어린아이에게만 해당할 뿐이겠는가? 어른의 일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으리라”고 말한 일화가 전한다. 15세 때에는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학풍을 흠모하여 미간(楣間)에 ‘경의(敬義)’를 써서 붙이고, 사서(四書)의 ‘구사(九思)·구용(九容)·사물(四勿)·삼성(三省)’ 등의 긴요한 말들을 벽에 붙여 놓아 항상 보며 마음에 새겼다. 그리고 성현의 유상(遺像)을 손수 모사하여 봉안하고 우러러 보며 절을 올렸다.
족숙(族叔) 균헌(筠軒) 정지로(鄭志魯)와 삼고재(三顧齋) 정지하(鄭志廈)에게 나아가 배웠다. 그리고 회산(悔山) 성채규(成采奎)[1812~1891], 해려(海閭) 권상적(權相迪)[1822~1900], 만성(晩醒) 박치복(朴致馥)[1824~1894], 월고(月皐) 조성가(趙性家)[1824~1904] 등과 교유하였다. 1866년(고종 3) 성재(性齋) 허전(許傳)[1797~1886]이 경상남도에 왔을 때 산천재(山天齋)에서 인사를 올리고 가르침을 받았다. 1886년(고종 23) 성재 허전의 부음을 듣고서 모한재(慕寒齋)에 신위(神位)를 세우고 곡을 하였다.
정우빈은 1892년(고종 29) 9월 부인이 먼저 별세하였고 12월 자신이 병이 위독하였는데, 자식들에게 “아버지가 살아계신데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어머니를 위해 1년상만 해야겠지만, 어머니의 상이 끝나지 않았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경우에는 어머니를 위해 삼년상을 해야 할 것이다”라고 유언하였다. 이는 스승인 성재 허전의 예설(禮說)에 근거하여 말한 것이다.
[학문과 저술]
저서로 문집 『간취당유집(澗翠堂遺集)』 3권 1책이 있다.
[묘소]
묘소는 처음 대각동(大覺洞)[현 진주시 수곡면 사곡리 대각마을로 추정]에 있었다가, 후에 경상남도 사천시 곤양면 대진리 어유산(魚游山)으로 이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