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4012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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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晉陽姜氏 |
영어의미역 | Jinyang Gang Clan |
이칭/별칭 | 진주 강씨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경상남도 하동군 |
시대 | 고려/고려 전기 |
집필자 | 박용국 |
세거|집성지 |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 두양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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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 시조 | 강이식 |
입향 시조 | 강민첨 |
[정의]
강이식을 시조로 하고 강민첨을 중시조로 하는 경상남도 하동군의 세거 성씨.
[개설]
진양 강씨는 고려 초에 이미 재경 관인(在京官人)과 재지 세력으로 분화하였다고 보고 있다. 중시조인 은열공(殷烈公) 강민첨(姜民瞻)[?~1021]은 전자에 해당한다. 강민첨은 고려 현종 때 거란이 침입하자 안찰사로서 동여진을 격퇴시켰고, 1018년(현종 9)에 거란의 소배압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오자 부원수로 출전하여 흥화진 등에서 격퇴시켰던 인물로서 사실상 진양 강씨의 중시조에 해당한다. 진양 강씨는 고려 중기 이후부터 조선 초기에 크게 번성하였다. 특히 강시(姜蓍)[1339~1400]의 5대조 국자박사(國子博士) 강계용(姜啓庸)을 파시조로 하는 집안이 크게 번성하였다.
[연원]
시조 강이식(姜以式)은 수(隋) 양제(煬帝) 때 병마도원수(兵馬都元帥)로 고구려를 정벌하러 왔다가 귀화하여 을지문덕과 함께 수나라 대군을 물리쳤다고 전하고 있다. 진양 강씨는 고려 태조 왕건(王建)에 의해서 본관을 진양[진주]로 하는 토성(土姓)을 분정(分定) 받았던 세력이었다. 따라서 진양 강씨의 선조는 나말 여초 진주 지역의 중소 호족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진양 강씨 가운데 강회백(姜淮伯)[1357~1402]의 가계는 고려 중기까지 계보를 확실히 파악할 수 있다. 양촌(陽村) 권근(權近)[1352~1409]이 지은 강시의 묘지명에는 그의 5대조는 국자박사 강계용이며, 그의 고조부는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 강인문(姜引文)으로 모두 유학자로서 현달하였다. 그의 증조부는 감찰어사(監察御史) 강사첨(姜師瞻)이며, 그의 조부는 판도정랑(版圖正郞) 강창귀(姜昌貴)로서 뒤에 문하시중 진원부원군(門下侍中晉原府院君)에 추증되었다. 그의 아버지 봉산군(鳳山君)은 시호가 문경(文敬)이고, 이름은 강군보(姜君寶)이다. 진양 강씨 박사공파는 국자박사 강계용을 파시조로 한다.
[입향 경위]
18세기 중엽의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이미 진양 강씨가 하동 지역의 세력 가문으로 기록되고 있다. 진양 강씨가 하동 지역에 입향한 것은 하동군 옥종면에 있는 강민첨 관련 유적과 「여장부 강씨부인」이라는 설화의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역사적 사실과 전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진양 강씨는 이미 고려 시대에 하동 지역[옥종면]에 분포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황]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2000년 현재 하동에 거주하는 진양 강씨는 953가구, 2,568명이다. 하동 지역의 진양 강씨 세거지는 하동군 옥종면 두양리이다. 집성촌은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지 않다.
[관련 유적]
두방재(斗芳齋)는 하동군 옥종면 두양리에 있는 사묘이자 재실로서 1983년 12월 20일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81호로 지정되었다. 이곳에서 강민첨의 영정을 모시며, 1910년에 후예들이 강민첨 신도비를 건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