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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401773
한자 世居姓氏
영어의미역 A Family Name of Residing for Generations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경상남도 하동군
집필자 박용국

[정의]

경상남도 하동군에서 여러 대(代)에 걸쳐 계속해서 살아오고 있는 성씨.

[개설]

성씨의 연원은 태조 왕건(王建)이 후삼국을 통일한 다음 전국의 군·현의 이름을 개정하고 개국 공신을 책봉했던 940년(태조 23)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 이전 고대 국가에서 성씨는 왕족과 극히 일부 중앙 귀족들만의 전유물이었다. 후삼국 시대 성주, 장군, 촌주 등의 신분을 지니면서 지방 세력을 대표하던 지방 귀족, 이른바 호족들은 고려의 개국과 후삼국 통일에 적극 참여함으로써 개국 공신에 오르고 태조 왕건으로부터 성씨를 하사받게 된다. 이후 호족들의 성씨는 출신지 또는 거주지를 본관으로 하는 세거 성씨가 되어 갔다. 따라서 현재 하동군에 세거하는 성씨의 대부분은 나말 여초 각 출신지, 또는 거주지를 본관으로 하는 토성이었다 하겠다.

[하동의 토성]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 하동현의 토성조(土姓條)에는 정(鄭)·곽(郭)·이(李)·하씨(河氏)가 나온다. 『경상도지리지』 진주 경내 악양현(岳陽縣)의 토성조에는 도(陶)·임(任)·손(孫)·오(吳)·박씨(朴氏)를 언급하고 있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하동현의 토성조에는 정·곽·이·하씨가 나온다. 『세종실록지리지』 진주목의 악양현 편에는 “성이 다섯인데, 도·오·임·손·박씨이며, 속성이 하나인데, 김해에서 온 김씨로서 향리이다. 없어진 복산(福山)·송자(松慈)의 두 곳 향은 성이 하나로서 문씨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31, 경상도 하동현의 성씨조에는 정·곽·이·하씨를 언급하고 있다. 악양에는 『신증동국여지승람』 권30, 경상도 진주목 악양현 편의 성씨조를 보면 도·오·임·손·박씨를 언급하고, 이어서 김씨는 속성이며, 화개(花開)에는 김씨가 기록되어 있다.

이상의 기록은 고려 시대 하동 지역의 혈족 집단의 형성과 변동 과정을 보여 주는 것으로써 매우 귀중한 내용을 담고 있다. 조선 중기까지 하동현의 토성조에 기록된 정·곽·이·하씨는 모두 하동을 본관으로 하는 토성이었다. 악양과 화개는 진답·적량과 함께 1702년(숙종 28) 진주에서 하동으로 분속되었다. 악양의 토성은 도·오·임·손·박씨이며, 속성 김씨는 향리였다. 화개는 김씨가 세거하고 있었는데, 부곡성이었다.

요컨대 하동은 고려 초기부터 4개의 성씨 집단이 유력한 토착 세력으로 존재하였으며, 특히 정씨가 그 세력을 대표하였음을 토성 명현을 통해서 잘 알 수 있다.

[토성 명현]

하동을 본관으로 하는 토성 가운데 정씨는 고려 중엽부터 뛰어난 인물을 배출하였다. 『경상도지리지』 하동현의 상경종사조(上京從仕條)에는 고려 원종 때의 인물로 정숙첨(鄭淑瞻), 공민왕 때의 인물로 정방길(鄭方吉)이 나오는데, 이들 모두 시중에 올랐으나 실적이 자세하지 않다고 하였다.

그런데 『신증동국여지승람』 권31, 경상도 하동현의 인물조에는 앞의 인물 후손들을 포함한 토성 명현이 자세히 나온다. 고려 정안(鄭晏)[?~1251]은 평장사 정숙첨의 아들이며, 처음 이름은 정분(鄭奮)이다. 성품이 총명하고 슬기로웠다. 젊었을 때 과거에 올랐고 음양·산술·의약·음률 등에 정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최이(崔怡)가 정권을 제 마음대로 결단하는 것을 보고 해를 피하고자 남해에 물러가 살면서 이름난 산을 두루 유람하였다. 그 뒤에 최이의 아들 최항(崔沆)이 정권을 잡고는 소환하여 참지정사로 삼았다. 최항은 사람들의 신망을 얻고자 정안을 대했는데, 겉으로는 비록 예우하는 모습을 갖추었으나 내심으로는 시기하였다. 그리하여 정치를 비방하고 난을 꾸몄다는 것으로써 백령도(白翎島)에 귀양 보냈다가 사람을 보내어 물에 빠뜨려 죽였다.

정지상(鄭之祥)공민왕을 따라 원(元)나라 조정에 들어가서 공로가 있었으며, 공민왕이 즉위하자 벼슬이 갑자기 올라서 감찰지평에 이르렀다. 전라도안렴사가 되어서는 그 경내에 들어가 세도 부리는 집의 사람을 만나면 갑자기 볼기를 쳐서 주리를 돌리니 온 도가 두려워하였다. 그 뒤에 호부시랑 어사중승으로 전임되었다.

정혼(鄭渾)은 처음 이름이 정종(鄭從)이며, 정지상의 아들이다. 어머니가 홀로 되어 담양부(潭陽府)에 살다가 왜구에게 살해당하였다. 창왕 때에 정혼이 전리좌랑이 되어 복수할 계책을 아뢰어 소모별감이 되기를 자청하고, 박위(朴葳)를 따라서 대마도를 정벌하였다. 정지연(鄭芝衍)은 현의 아전 정국룡(鄭國龍)의 아들이다. 처음으로 가문을 일으켜서 첨의찬성이 되었다.

조선 시대의 정인지(鄭麟趾)정지연의 오대손이다. 1414년(태종 14) 과거에 나이 19세로서 장원하였고, 1425년(세종 7) 중시에 또 장원하였다. 대각의 여러 관직을 두루 지냈고, 오랫동안 대제학을 맡았다. 여러 번 인재를 천거하는 공거(貢擧)를 맡아 그의 문하에서 당시 명사가 많이 나왔다. 정난(靖難)·좌익(佐翼)·익대(翊戴)·좌리(佐理)라는 네 가지 공신이 되어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다. 83세까지 살았으며,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정초(鄭招)[?~1434]는 총명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났다.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났고, 벼슬이 예문관 대제학에 이르렀다. 정수충(鄭守忠)은 경사에 정통하고 행실이 있었다. 세조조에 좌익공신으로서 하원군(河原君)으로 봉함을 받았다. 정경조(鄭敬祖)정인지의 아들이다. 과거에 올랐고 벼슬이 평안도관찰사에 이르렀다.

정여창(鄭汝昌)[1450~1504]은 8세 때에 중국 사신 장녕(張寧)이 보고 기이하게 여겨서 여창이라 이름하였다. 지극한 효성으로 어버이를 섬겼고, 성리학에 정통하였다. 성종이 특히 참봉으로 제수하여 표창하였다. 과거에 올랐다가 무오년 사화에 걸려들어서 귀양 갔다가 죽었다. 중종은 1518년(중종 13)에 영의정으로 증직하여 봄·가을에 제사를 내리고, 해마다 그의 집에 양식을 보냈다.

[18세기 중엽 하동의 성씨]

하동 지역에는 여말 선초부터 조선 후기까지 끊임없이 다른 지역에서 새로운 성씨가 유입하게 된다. 이들 성씨는 이전의 하동 토성이 중앙에서 벼슬살이를 그만 두고 낙향한 경우이거나 다른 지역에서 여러 이유로 인하여 이주해 온 것이었다. 하동군에 이주해 온 성씨들은 입향조(入鄕祖)를 정점으로 해서 후손들이 집성촌을 형성하는 특징을 갖기도 한다.

조선 시대 하동 지역의 세거 성씨를 보면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하동 정씨(河東鄭氏), 진양 정씨(晉陽 鄭氏), 연일 정씨(延日鄭氏), 광주 김씨(光州金氏), 용궁 김씨(龍宮金氏), 월성 김씨(月城金氏), 안동 김씨(安東金氏), 함창 김씨(咸昌金氏), 의성 김씨(義城金氏), 김해 김씨(金海金氏), 완산 이씨(完山李氏), 공산 이씨(公山李氏), 합천 이씨(陜川李氏), 전의 이씨(全義李氏), 금구 이씨(金溝李氏), 성산 이씨(星山李氏), 진양 강씨(晉陽姜氏), 밀양 손씨(密陽孫氏), 창령 손씨(昌寧孫氏), 은진 임씨(恩津林氏), 문경 송씨(聞慶宋氏), 안동 권씨(安東權氏), 의령 여씨(宜寧余氏), 완산 전씨(完山全氏), 창원 공씨(昌原孔氏), 단성 문씨(丹城文氏), 창녕 조씨(昌寧曺氏), 진주 유씨(晉州柳氏), 창녕 성씨(昌寧成氏), 이천 서씨(利川徐氏), 대구 서씨(大丘徐氏), 김해 허씨(金海許氏), 함양 박씨(咸陽朴氏), 철성 박씨(鐵城朴氏)의 순서로 정리되어 있다. 그런데 이때 진양 하씨가 언급되지 않은 것이 주목된다. 진양 하씨는 1906년까지 진주에 속했던 하동의 옥종면에 주로 세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 하동의 성씨]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2000년 현재 하동에 거주하는 성씨는 가(賈)·갈(葛)·감(甘)·강(姜)·강(康)·강(彊)·경(慶)·경(景)·계(桂)·고(高)·공(孔)·공(公)·곽(郭)·구(具)·구(丘)·국(鞠)·국(國)·권(權)·금(琴)·기(奇)·기(箕)·길(吉)·김(金)·나(羅)·남(南)·남궁(南宮)·노(盧)·노(魯)·노(路)·도(都)·도(道)·동(董)·마(馬)·맹(孟)·모(牟)·모(毛)·목(睦)·문(文)·미(米)·민(閔)·박(朴)·반(潘)·방(方)·방(房)·배(裵)·백(白)·범(范)·변(卞)·변(邊)·봉(奉)·부(夫)·빈(賓)·빈(彬)·사공(司空)·서(徐)·서문(西門)·석(石)·석(昔)·선(宣)·선우(鮮于)·설(薛)·성(成)·소(蘇)·소(邵)·손(孫)·송(宋)·송(松)·신(申)·신(辛)·신(愼)·심(沈)·아(阿)·안(安)·양(梁)·양(楊)·양(樑)·어(魚)·엄(嚴)·여(呂)·여(余)·여(汝)·연(延)·연(連)·염(廉)·영(榮)·예(芮)·오(吳)·옥(玉)·온(溫)·왕(王)·우(于)·우(禹)·운(雲)·원(元)·위(魏)·유(柳)·유(兪)·유(庾)·유(劉)·육(陸)·윤(尹)·은(殷)·음(陰)·이(李)·이(異)·이(伊)·인(印)·임(林)·임(任)·장(張)·장(蔣)·장(章)·전(全)·전(田)·전(錢)·정(鄭)·정(丁)·정(程)·제(諸)·제(齊)·조(趙)·조(曺)·주(朱)·지(池)·지(智)·진(陳)·진(秦)·진(晋)·진(眞)·차(車)·채(蔡)·채(菜)·채(采)·천(千)·천(天)·최(崔)·추(秋)·추(鄒)·탁(卓)·팽(彭)·편(扁)·표(表)·하(河)·하(夏)·한(韓)·한(漢)·함(咸)·해(海)·허(許)·현(玄)·형(邢)·호(扈)·호(胡)·홍(洪)·화(化)·황(黃)·황보(皇甫)·흥씨(興氏) 등이다.

2000년 당시 하동에 거주한 성씨는 모두 158개이다. 이 통계에는 2000년 성씨 조사 때 세대를 이루지 못한 채 하동에 거주한 성씨가 포함되어 있다.

이 가운데 18세기 중엽 이후 2000년까지 하동에 대대로 세거하는 성씨는 하동 정씨가 181가구 486명, 진양 정씨가 1,038가구 2,718명, 연일 정씨가 353가구 818명, 광주 김씨가 244가구 644명, 용궁 김씨가 198가구 467명, 월성 김씨가 2가구 4명, 안동 김씨가 57가구 171명, 함창 김씨가 57가구 124명, 의성 김씨가 46가구 109명, 김해 김씨가 2,319가구 6,451명, 완산 이씨가 1,078가구 3,081명, 공산 이씨가 15가구 42명, 합천 이씨가 394가구 965명, 전의 이씨가 25가구 62명, 금구 이씨가 4가구 8명, 성산 이씨가 24가구 67명, 진양 강씨가 953가구 2,568명, 밀양 손씨가 235가구 633명, 창녕 손씨가 전무(全無), 은진 임씨가 4가구 15명, 문경 송씨가 18가구 48명, 안동 권씨가 126가구 353명, 의령 여씨가 225가구 545명, 완산 전씨가 58가구 163명, 창원 공씨가 1가구 4명, 단성 문씨가 37가구 68명, 창녕 조씨가 220가구 601명, 진주 유씨가 18가구 53명, 창녕 성씨가 73가구 193명, 이천 서씨가 52가구 138명, 대구 서씨가 9가구 28명, 김해 허씨가 81가구 206명, 함양 박씨가 127가구 332명, 철성 박씨가 3가구 7명으로 조사되었다.

2000년 통계청 조사에 의하면 이상의 성씨 외에 하동에 대대로 살아온 주요 성씨는 밀양 박씨(密陽朴氏)가 1,170가구 3,283명, 경주 김씨(慶州金氏)가 521가구 1,433명, 경주 최씨(慶州崔氏)가 344가구 968명, 진양 정씨(晉陽河氏)가 316가구 825명, 함안 조씨(咸安趙氏)가 289가구 844명, 창원 황씨(昌原黃氏)가 266가구 711명, 김녕 김씨(金寧金氏)가 246가구 664명, 남평 문씨(南平文氏)가 237가구 677명, 달성 서씨(達成徐氏)가 230가구 637명, 청주 한씨(淸州韓氏)가 217가구 576명, 전주 최씨(全州崔氏)가 207가구 507명, 나주 임씨(羅州林氏)가 175가구 516명, 인동 장씨(仁同張氏)가 162가구 436명, 경주 정씨(慶州鄭氏)가 158가구 461명, 장수 이씨(長水李氏)가 132가구 358명, 의령 남씨(宜寧南氏)가 127가구 288명, 함안 이씨(咸安李氏)가 125가구 322명, 성주 이씨(星州李氏)가 121가구 350명, 수원 백씨(水原白氏)가 111가구 318명으로 조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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