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4012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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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陜川李氏 |
영어의미역 | Hapcheon Yi Clan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경상남도 하동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박용국 |
입향지 | 경상남도 하동군 악양면 맥수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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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거|집성지 | 경상남도 하동군 악양면 신대리 |
세거|집성지 | 경상남도 하동군 악양면 중대리 |
세거|집성지 | 경상남도 하동군 고전면 성천리 |
세거|집성지 | 경상남도 하동군 진교면 고이리 |
세거|집성지 | 경상남도 하동군 양보면 지례리 |
성씨 시조 | 이개 |
입향 시조 | 이석후|이시빈 |
[정의]
이개를 시조로 하고 이석후·이시빈을 입향조로 하는 경상남도 하동군의 세거 성씨
[개설]
합천 이씨는 합천을 본관으로 하고 이개(李開)를 시조로 하며, 10세손인 이수전(李守全)[전서공파의 파시조] 대에 이르러 15파로 분파하였다. 이 15파 가운데 하나인 전서공파가 가장 번성하였다. 하동 지역의 합천 이씨는 전서공파와 더불어 참지공파[파시조 이양진(李良眞)]의 후손들이 하동군 악양면·양보면·진교면·고전면 일원에 세거하고 있다. 합천 이씨는 18세기 중엽 이전에 이미 하동 지역에 상당한 정도로 세력을 이루고 있었다.
[연원]
합천 이씨의 시조는 고려 강양군(江陽君)[강양은 합천의 옛 이름이다]의 호장(戶長) 이개이다. 이개는 신라 6촌장 중의 하나로 알천(閼川) 양산촌(楊山村)의 촌장이며, 유리왕 때 이씨 성을 하사받았다는 이알평(李謁平)의 후손이라고 한다. 따라서 합천 이씨는 경주 이씨(慶州李氏)에서 분적(分籍)된 성씨인 셈이다. 그가 합천 호장(陜川戶長)을 지냈고, 그곳에서 죽은 것을 연유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여 합천을 관향(貫鄕)으로 삼아 대대로 이어오고 있다.
합천 이씨는 세계가 복잡하여 15개 파로 대별되는데, 그 중에서도 전서공파가 가장 번창하였다. 그밖에 목사공파(牧使公派)[파조 이공주(李公柱)]·참지공파·전객령공파(典客令公派)[파조 이림(李琳)] 등이 절대다수를 차지한다. 하동 지역의 합천 이씨는 대부분 전서공파와 참지공파의 후손들이다.
[입향 경위]
하동군 악양면 중대리에 있는 만수재(萬壽齋)의 기문에는 “시조 이개의 20세손 이석후(李錫垕)가 왜구의 침탈을 피하고자 큰 아들 이경기(李擎基)를 데리고 누대에 걸쳐 세거하던 전라남도 광양군 옥곡면을 떠나 하동군 악양면 맥수동(麥秀洞)으로 시거(始居)하였다.”는 내력을 밝히고 있다.
한편 하동군 고전면 성천리의 합천 이씨는 이개의 20세손 이승문(李承文)이 입향조임을 추원재(追遠齋)의 연혁에 밝혀 놓았다. 하동군 악양면 신대리에 소재하는 영모재(永慕齋)의 연혁에는 “하동 악양의 합천 이씨는 원시조로부터 61세손이요, 중시조 이개로부터 22세손인 이시빈(李時馪)이 1580년(성종 11) 무렵에 악양에 입향하였다.”라고 나온다.
18세기 중엽 이전의 하동 지역 세거 성씨를 보여 주는 『여지도서(輿地圖書)』에 합천 이씨가 확인된다. 이보다 조금 늦은 정조(正祖) 연간에 이사증(李師曾)이 양보면으로 시거(始居)한 이후 후손이 번창하였다는 기록이 하동군 악양면 축지리 소재의 「광천재기(廣川齋記)」에 보인다. 또한 이개의 26세손인 숭정대부 이원연(李元淵)이 하동군 양보면 지례리 가락동(佳樂洞)에 기거(起居)하였다는 기록이 가락재(佳樂齋)의 기문에 보인다.
[현황]
2000년 통계청의 인구 조사에 의하면 전국의 합천 이씨는 3만 6411가구 모두 11만 5462명이며, 하동에 거주하는 합천 이씨는 394가구 965명이다. 합천 이씨는 하동군 악양면 신대리, 악양면 중대리, 고전면 성천리, 진교면 고이리, 양보면 지례리 가락동에 세거하고 있다.
[관련 유적]
하동군 악양면 중대리에 있는 만수재는 맥수동의 합천 이씨 입향조와 그 선조의 내력을 밝히고 조상을 기리기 위한 재실이다. 하동군 악양면 신대리에 있는 영모재(永慕齋)는 악양면의 합천 이씨 입향조 이후 여러 조상을 시향(時享)하는 재실이다. 하동군 악양면 축지리에 있는 광천재(廣川齋)는 하동 입향조 이사증을 시향하는 합천 이씨 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