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4011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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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星州李氏 |
영어의미역 | Seongju Yi Clan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경상남도 하동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박용국 |
[정의]
이순유를 시조로 하고 이구를 입향조로 하는 경상남도 하동군의 세거 성씨.
[개설]
성주 이씨의 시조는 신라 말의 명재상 이순유(李純由)이다. 성주 이씨는 고려 말에 크게 번성하였다. 시조 이순유로부터 12세인 농서군공 이장경(李長庚)은 이득희(李得禧)의 아들로 슬하에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다섯째 이조년(李兆年)[1269~1343]의 증손인 이제(李濟)[?~1398]가 하동 지역의 입향조 이구(李鷗)의 고조부이다.
[연원]
이순유의 12세손인 이장경은 다섯 아들을 두었다. 밀직사사 이백년·참지정사 이천년·낭장 이만년·참찬 이억년·정당문학 이조년 등이었다. 이조년은 아들이 이포(李褒)[?~1373], 손자가 이인립(李仁立), 증손이 이제이다.
이제는 음보(蔭補)로 벼슬길에 올라 1352년(공민왕 1) 좌대언(左代言)이 되고, 그 해 밀직제학(密直提學)으로 연저수종공신(燕邸隨從功臣) l등에 책록되었다. 이성계와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康氏) 소생인 셋째 딸 경순공주(慶順公主)와 결혼했다. 1392년(공양왕 4) 전법판서(典法判書)로 정몽주(鄭夢周) 격살에 참여했으며, 이성계의 조선 건국을 도와 개국공신 1등에 책록되고, 흥안군(興安君)에 봉해졌다. 1393년(태조 2) 우군절제사(右軍節制使)에 올랐지만 1398년(태조 7) 제1차 왕자의 난 때 정도전(鄭道傳) 일파로 몰려 살해되었고, 경순공주는 비구니가 되었다. 세종 때 신원(伸寃)되어 태조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입향 경위]
흥안군 이제의 후손 성주 이씨 가계가 진주 경내 사월리에 이주하게 된 계기는 두 가지 설이 있다. 먼저 『운창지(雲窓誌)』에 따르면 태종이 신덕왕후 강씨의 능을 폐할 때 흥안군 이제의 손자인 이숙순(李叔淳)·이계순(李季淳)·이의순(李義淳) 형제는 신덕왕후의 외증손이라고 하여 단성으로 유배되었는데, 이를 계기로 단성에 정착하였다. 한편 무산재(武山齋) 이봉흥(李鳳興)[1735~1810]의 『무산재유고(武山齋遺稿)』의 「기성주이씨낙남사(記星州李氏落南事)」에는 그들 형제가 단종 복위 사건에 연루되어 화를 당할까봐 단성으로 둔거(遁居)하였다고 하였다.
『성주이씨경무공파세보(星州李氏景武公派世譜)』에 따르면 하동 지역의 성주 이씨는 경무공파의 파시조인 경무공 이제의 손자인 이숙순·이계순·이의순 형제가 단성현에 입향하고, 그 후손이 서부 경남 지역으로 확산되는 과정에서 하동으로 입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하동 지역 성주 이씨의 입향조는 이숙손의 손자인 이구이다.
[현황]
2000년 통계청 조사에 의하면 성주 이씨는 하동 지역에 121가구 350명이 살고 있다. 현재 하동 지역의 성주 이씨는 뚜렷한 집성촌을 형성하고 있지 않다.
[관련 유적]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 남사마을에 있는 ‘이씨 고가(李氏古家)’는 경무공 이제의 후손들이 대대로 살아온 집이다. 하동 지역 성주 이씨 입향조인 이구의 증조부이다. 관련 유물로는 보물 제1294호인 ‘이제개국공신교서(李濟開國功臣敎書)’가 전하고 있다. 이 유물은 1392년(태조 원년) 10월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조선 개국에 공을 세운 배극렴(裵克廉)·조준(趙浚) 등과 더불어 이제에게 내린 개국 공신 교서로서 현재까지 유일하게 전해지고 있다. 그 역사적·사료적 가치가 클 뿐만 아니라, 조선 시대 최초의 공신 교서의 형식을 알려 주고 있는 귀중한 문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