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40128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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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麟趾 |
영어음역 | Jeong Inji |
이칭/별칭 | 백저(伯雎),학역재(學易齋),문성(文成)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남도 하동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전병철 |
[정의]
조선 전기 하동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하동(河東). 자는 백저(伯雎), 호는 학역재(學易齋).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 정지연(鄭芝衍)의 5세손이다. 아버지는 석성현감(石城縣監) 증영의정부사(贈領議政府事) 정흥인(鄭興仁)이며, 어머니는 진천의(陳千義)의 딸이다. 아들은 정현조(鄭顯祖)·정숭조(鄭崇祖)·정경조(鄭敬祖)·정상조(鄭尙祖)이다. 정현조는 세조의 딸인 의숙 공주(懿淑公主)에게 장가들었고, 1471년(성종 2) 성종 즉위 및 보필에 대한 공으로 좌리공신(佐理功臣)이 되어 하성군(河城君)에 봉(封)해졌으며, 정숭조도 좌리공신으로 하남군(河南君)에 봉해졌다.
[활동 사항]
정인지(鄭麟趾)[1396~1478]는 아버지 정흥인이 내직별감(內直別監)으로 있을 때 소격전(昭格殿)에 들어가 재(齋)를 올리면서 집안을 일으킬 아들을 낳게 해 달라고 마음속으로 빌어 부인 진씨가 임신하였을 때 이몽(異夢)을 꾸고 낳았다고 한다. 5세에 독서를 할 줄 알아 눈만 스치면 곧 암송(暗誦)하고 글도 잘 지었다고 한다. 매헌(梅軒) 권우(權遇)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414년(태종 14)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예빈시주부(禮賓寺注簿)에 제수되었다. 이어 사헌부감찰·예조좌랑을 등을 역임하였다. 세종의 신임을 받아 1424년(세종 6) 집현전관(集賢殿官)에 뽑히면서 응교(應敎)에 제수되었으며, 다음 해 직전(直殿)으로 승진하였다. 1427년(세종 9) 문과 중시(重試)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다시 직제학으로 승진하고 세자시강원좌필선을 겸직하였다. 이듬해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오르면서 부제학으로 승진하였다.
1430년(세종 12) 10월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라 우군동지총제(右軍同知摠制)가 되었다. 이후로 인수부윤(仁壽府尹)·예문관제학 등을 역임하였으며, 1435년(세종 17) 6월 충청도관찰사로 나간 뒤 이듬해 9월 부친상으로 사직하였다. 1437년(세종 19) 세종의 문운 육성에 대한 관심과 함께 복직되어 예문관제학에 서용되고, 1439년(세종 21) 집현전제학이 된 뒤 곧이어 형조참판으로 옮겼다가, 1440년(세종 22) 5월 정연(鄭淵)의 천거를 받아 형조판서에 발탁되었다. 같은 해 11월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를 거쳐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43년(세종 25) 지중추원사로서 당시 찬반 논의가 격렬하던 공법(貢法)을 극력 주장한 끝에 시행을 확정하는 데 공헌하였다. 1445년(세종 27) 1월 의정부우참찬이 되고, 이듬해 예조판서를 거쳐 1447년(세종 29) 이조판서가 된 뒤 지춘추관사가 되었다.
1449년(세종 31) 공조판서를 거쳐 1450년(문종 즉위년) 의정부좌참찬, 1455년 세조의 즉위와 함께 영의정으로 승진되고 세자사(世子師)를 겸직하였다. 또한 세조의 즉위에 끼친 공로로 좌익공신(佐翼功臣) 3등에 녹훈되었다. 1458년(세조 4) 공신을 위해 잔치를 베풀었을 때, 세조의 불서(佛書) 간행을 반대한 일로 왕의 노여움을 사서 불경죄로 논죄되면서 고신(告身)이 몰수되었으나, 곧이어 고신을 돌려받고 하동부원군(河東府院君)에 제수되었다.
1459년(세조 5) 취중에 직간한 일이 왕에게 무례를 범하였다고 논죄되면서 다시 고신을 몰수당하였으나, 그해에 다시 소환되어 고신을 돌려받고 그 이듬해 하동부원군에 복직되었다. 1465년(세조 11) 70세가 되어 벼슬을 그만두기를 청하였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고 궤장(几杖)을 하사받았다. 이듬해 관제 개혁으로 하동부원군에서 하동군(河東君)으로 다시 봉해졌다.
1468년(예종 즉위년) 남이(南怡)의 옥사에 끼친 공로로 다시 익대공신(翊戴功臣) 3등에 녹훈되었으며, 1470년(성종 1) 부원군의 호칭이 복구됨에 따라 다시 하동부원군으로 개봉(改封)되고 경연영사(經筵領事)를 겸직하였다. 같은 해 1467년(세조 13) 설치된 원상에 임명되어 국왕 측근에서 국정의 논의와 처결의 실권을 장악하였고, 1471년 성종 즉위에 끼친 공로로 또다시 좌리공신 2등에 녹훈되었다.
1478년(성종 9) 성종의 호학(好學) 및 당시의 문운 융성과 함께 연덕(年德)을 구비하고 명망이 높은 유학자를 삼로 오갱(三老五更)[왕사(王師)]으로 봉하여 문풍을 더한층 진작시키자는 논의와 함께 삼로에 선정되었다. 그러나 그 진봉식 거행 직전에 대간이 “한미한 가문에서 태어나 벼슬에 나아왔으며, 재산을 증식하는 데 전념하여 부를 축적하였으니 불가하다”라고 반대하였다. 비록 한명회(韓明澮) 등의 대신이 그를 위해 변호하였지만, 결국은 진봉되지 못하였다.
[학문과 저술]
관직 생활 동안 문한(文翰)을 관장하고 역사·천문·역법·아악을 정리하였으며, 한글 창제에도 참여하는 등 문풍 육성과 제도 정비에 기여하였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의 정인지 졸기에 의하면, “타고난 자질이 호걸스럽고 영매(英邁)하며, 마음이 활달하고, 학문이 해박하여 통하지 아니한 바가 없었다”라고 한다. 세종이 천문과 역산(曆算)에 뜻을 두어 대소(大小) 간의(簡儀), 규표(圭表)와 흠경각(欽敬閣)·보루각(報漏閣)을 제작할 때 다른 신하들은 그 깊이를 이해하지 못하였는데, 세종이 “정인지만이 이것을 함께 의논할 수 있다”라고 명하여 모두 담당하게 하였다.
또 역대 역법의 같고 다른 점과 일식·월식·오성(五星)·사암(四暗), 그리고 전도(躔度)[천체 운행의 도수]의 순역(順逆) 관계를 편찬하게 하였는데, 그가 직접 맡아서 계산한 것은 관측이 매우 정확하여 노련한 일관(日官)이라도 따라갈 수가 없었다 한다. 그리고 정치, 역사, 천문·역법·아악 등에 관한 많은 책을 편찬하였다. 먼저 정치 관련 서적을 보면, 1442년(세종 24) 예문관대제학으로 『사륜요집(絲綸要集)』을 편찬하였다.
『사륜요집』은 진·한 이래 명나라까지의 제고와 조칙을 편찬한 사륜 전집 중 긴요한 것만 뽑은 책이다. 1445년에도 의정부우참찬으로서 나라의 명을 받아 역대 사적 중 귀감이 될 만한 사실만을 뽑아서 엮은 『치평요람(治平要覽)』을 편찬하였다. 실록 편찬에도 참여하여 1447년 『태조실록(太祖實錄)』을 증수(增修)하였다. 1451년(문종 1) 김종서(金宗瑞) 등과 함께 『고려사(高麗社)』를 개찬(改撰)하였으며, 1452년 김종서 등과 다시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를 편찬하였다. 1454년(단종 2)부터는 『세종실록(世宗實錄)』의 편찬을 총괄하였다.
천문 및 역법과 관련해서는 1431년(세종 13) 정초(鄭招)와 함께 대통력(大統曆)을 개정하고 『칠정산내편(七政算內篇)』을 저술하는 등 역법을 정비하였다. 이 외에도 안지(安止) 등과 함께 『용비어천가』를 지었으며, 성삼문(成三問)·신숙주(申叔舟)와 함께 훈민정음의 창제에도 공이 컸다.
문집으로 『학역재집(學易齋集)』이 있다. 그의 졸기에 따르면 “정인지의 문장은 호한(浩汗)[넓고 큼]하고 발월(發越)[기상이 뛰어남] 하여 조탁(雕琢)[다듬고 손질함]을 일삼지 아니하였다. 오래도록 문병(文柄)을 장악하여 고문대책(高文大冊) 등이 그의 손에서 많이 나왔다”라고 한다.
[묘소]
묘소는 충청북도 괴산군 불정면 외령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1478년 11월 26일 정인지가 세상을 떠나자 왕은 조회(朝會)를 철폐하고, 부의(賻儀)·조제(弔祭)·예장(禮葬) 등을 전례(前例)와 같이 하였다. 시호는 문성(文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