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4014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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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崔瓊秉 |
영어음역 | Choe Gyeongbyeong |
이칭/별칭 | 영호(永好),신계(新溪),수당(修堂)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상남도 하동군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전병철 |
출생 시기/일시 | 186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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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23년 |
활동 시기/일시 | 1939년 |
몰년 시기/일시 | 1939년 |
출생지 | 경상남도 하동군 북천면 옥정리 남포마을 |
거주|이주지 | 경상남도 하동군 횡천면 전대리 |
거주|이주지 | 경상남도 하동군 북천면 서황리 중촌마을 |
묘소|단소 | 경상남도 하동군 고전면 신월리 냉정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전주(全州) |
[정의]
근대 하동 출신의 유학자.
[가계]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영호(永好), 호는 수당(修堂). 처음에는 호를 ‘신계(新溪)’라고 하였다가, 자신을 수양하는 데 더욱 힘쓰겠다는 뜻을 담아 수당이라 하였다. 태안군수(泰安郡守) 모산(茅山) 최기필(崔琦弼)[1562~1593]의 10세손이며, 익찬(翊贊) 죽당(竹塘) 최탁(崔濯)[1598~1645]의 9세손이다. 5대조는 경암(景菴) 최동욱(崔東旭)이며, 고조할아버지는 만회당(晩晦堂) 최진섭(崔震燮)이고, 증조할아버지는 최중벽(崔重璧)이며, 할아버지는 법산(法山) 최수민(崔粹民)이다.
아버지는 최제하(崔濟夏)이며, 어머니는 강제대(姜濟大)의 딸인 진양 강씨(晉陽姜氏)이다. 전처는 박효근(朴孝瑾)의 딸 반남 박씨(潘南朴氏)인데 남편보다 35년 일찍 별세하였으며, 그 사이에 3남을 두었다. 후처는 성산 이씨(星山李氏)로 그 사이에 4남 1녀를 두었다.
[활동 사항]
최경병(崔瓊秉)[1865~1939]은 하동군 북천면 옥정리 남포마을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적 부친을 따라 횡천면 전대리로 이거하였다가 다시 북천면 서황리 중촌마을로 돌아와 선조인 죽당 최탁의 유허지 옆에 거주하였다. 아버지가 시력을 잃어 곁에 있는 물건도 분변할 수 없었는데, 식사를 하거나 출입을 할 적에 모든 것을 곁에서 시중들며 극진히 모셨다.
공부할 시기를 잃어서는 안 된다는 부모의 명을 받들어 남포마을의 정씨 가숙(鄭氏家塾)에 나아가 학업을 익혔으며, 날이 저물어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 곁을 떠나지 않았다. 정씨 가숙이 문을 닫게 되어 청룡동(靑龍洞)의 이씨 서당(李氏書堂)으로 가서 책을 읽었다. 그러다가 마침 기동(基洞)의 친족들이 집을 사서 서숙으로 만들자, 집과 가까워 아버지 시중과 독서를 병행할 수 있게 된 것을 기뻐하며 그곳에서 공부하였다.
이후 족조(族祖)인 계남(溪南) 최숙민(崔琡民)[1837~1905]에게 나아가 수학하였다. 죽당의 유허지에 영사재(永思齋)를 지어 선조에 대한 경모의 마음을 담았으며, 그곳에 기거하며 학문을 닦았다. 당시 남호(南湖) 강영지(姜永祉)[1857~1916]가 진주로부터 와서 우거하고 있었는데, 그와 더불어 날마다 함께 거처하며 학문을 강마하고 토론하였다. 1898년(고종 35) 봄 진주와 하동의 선비들에게 권하여 하북(河北) 사정등(射亭嶝)에서 향음주례(鄕飮酒禮)를 거행하였다.
그리고 어려운 여건 속에서 공부하는 벗들과 함께 영사재·직하재(稷下齋)·낙산재(樂山齋) 세 재실에서 봄가을로 날짜를 정해 돌아가면서 강학을 하기로 정하였다. 영사재는 최경병이 주관하고, 직하재는 석전(石田) 문진호(文晉鎬)[1860~1901]·초재(初齋) 문철호(文澈鎬) 형제가 맡았으며, 낙산재는 우석(愚石) 김병립(金炳立)이 진행하였다. 그 계의 이름을 ‘곤학계(困學契)’라고 하였다. 강학하는 날에는 먼저 상읍례(相揖禮)를 행한 후, 주자(朱子)의 「백록동규(白鹿洞規)」와 「남전여씨향약(藍田呂氏鄕約)」을 독송하였다.
선조인 모산과 죽당을 모실 곳이 없음을 안타까이 여겨 친족 및 지역 유림과 함께 ‘경현계(景賢契)’를 결성하고, 1923년 봄에 하동 서황리 경현당(景賢堂)을 건축하였다. 1939년 병이 들자 경현당에서 신천서당(新川書堂)으로 거처를 옮겼다. 신천서당은 그를 위해 제자들이 지은 강학 공간인데, 이전에는 경현당을 비울 수 없다는 이유로 거처하지 않다가 병이 위독하여 제자들의 청에 따라 옮긴 것이다. 같은 해 9월 20일 향년 75세로 별세하였다.
[학문과 저술]
저서로 문집 『수당집(修堂集)』 8권 4책이 있다. 나라가 주권을 잃고 세태가 황망한 것에 대해 탄식과 울분을 토하였다. 그때 회산(晦山) 이택환(李宅煥)[1854~1924]이 세상을 떠나 화계(花溪)에서 숨어 살기를 계획하자 그를 비롯하여 뜻이 맞는 동지들과 함께 ‘화계십일(花溪十逸)’을 결사(結社)하여 매년 중양절에 국화를 막걸리에 띄우고 시가를 부르며 답답한 마음을 풀었다. 이후 이 결사에 함께하고자 하는 이들이 많아져 50명에 이르렀다.
[묘소]
묘소는 하동군 고전면 신월리 냉정(冷井)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