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4013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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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崔濯 |
영어음역 | Choe Tak |
이칭/별칭 | 극수(克修),죽당(竹塘)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남도 하동군 북천면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전병철 |
출생 시기/일시 | 159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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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630년 |
활동 시기/일시 | 1636년 |
활동 시기/일시 | 1645년 |
몰년 시기/일시 | 1645년 |
출생지 | 경상남도 하동군 북천면 |
묘소|단소 | 경상남도 하동군 고전면 호사리 |
성격 | 무신 |
성별 | 남 |
본관 | 전주 |
[정의]
조선 후기 하동 출신의 무신.
[가계]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극수(克修), 호는 죽당(竹塘). 할아버지는 최정(崔涏)이며, 아버지는 군수 최기변(崔琦抃)이다.
[활동 사항]
최탁(崔濯)은 1598년(선조 31) 지금의 경상남도 하동군 북천면에서 태어났다. 1630년(인조 8)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 겸 비국랑이 되었으며, 1636년 광양현감에 제수되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에서 싸웠으나 인조가 청나라 군대에게 항복하자, 심양(瀋陽)에 볼모로 잡혀 가는 소현세자(昭顯世子)를 모시고 따라갔다.
1645년(인조 23) 귀국하여 죽산부사에 제수되었으나 곧 사퇴하고 속리산에 은거하였다. 관직을 버린 죄로 남양(南陽)에 유배되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풀려나 재자관(齎資官)으로 청나라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때 최탁은 눈물을 흘리면서 청나라 오랑캐에게 자신을 ‘신하’로 일컬을 수 없다면서 벼슬을 그만두려 하였다. 그러나 인조의 간곡한 당부로 부득이 청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는 도중 옥하관(玉河關)에서 병사하였다.
[학문과 저술]
후손들이 최탁(崔濯)의 행적을 적은 『죽당실기(竹塘實記)』 1책이 전한다.
[묘소]
왕명으로 반장(反葬)하여 경상남도 하동군 고전면 호사리에 안장하였다.
[상훈과 추모]
우부승지에 증직되었으며, 지역 유림이 인천서원(仁川書院)을 건립하여 제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