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401550
한자 九印亭遺墟碑
영어의미역 Monument of Guinjeong Pavilion Site
분야 역사/근현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비
지역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 두양리 519-9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정연가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현 소재지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 두양리 519-9 지도보기
성격 유허비
관련 인물 최정(崔涏)|최기연(崔琦衍)|최기변(崔琦抃)|최기필(崔琦弼)|최기준(崔琦準)|최설(崔渫)|최호(崔滬)|최탁(崔濯)|최수(崔洙)|최혼(崔渾)
재질 화강암
크기(높이, 너비, 두께) 180㎝[높이]|58㎝[너비]|29㎝[두께]
소유자 전주 최씨 문중
관리자 전주 최씨 문중 최규범

[정의]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 두양리에 있는 구인정(九印亭)의 유허비.

[건립 경위]

조선 후기 형조참판 전주 최씨(全州崔氏) 최정(崔涏)이 하동군 옥종면 두양리 두양마을에 살면서 심은 정자나무가 크게 자라 좋은 휴식처가 되었다. 훗날 관직에 나간 최정의 아들과 조카 9명이 이곳에 자주 모여 정자나무에 인끈을 걸어 놓고 어울려 휴식을 취한 사실이 후세에까지 전해 왔다. 그 아홉 명은 전주판관 최기연(崔琦衍), 태안군수 최기변(崔琦抃), 진주판관 최기필(崔琦弼), 명천부사 최기준(崔琦準), 중추부사 최설(崔渫), 흥덕현감 최호(崔滬), 승정원좌승지 최탁(崔濯), 사포별제 최수(崔洙), 진주영장 최혼(崔渾)이었다.

1900년경 정자나무가 고사하고 터만 남아 있어 아홉 인물의 후손들이 뜻을 모아 조상들의 흔적을 후세에 기리고자 정자나무 터에 유허비를 세웠다. 유허비의 명칭을 ‘구인정 유허비(九印亭遺墟碑)’라 한 이유는 9명의 관원이 각자의 인끈을 정자나무에 걸어 놓고 휴식을 취하였다는 사실을 두고 지은 것이다.

[위치]

구인정 유허비하동군 옥종면 두양리 519-6번지 두양마을 어귀 농로 변 농경지에 있다. 옥종면사무소에서 산청 방면으로 통하는 지방도 1005호선 8㎞ 지점이다. 마을 앞 동향 2㎞쯤에 덕천강이 흐르며,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방향 1.5㎞ 지점에 두양교가 있다.

[형태]

넓이 15×12m의 사각형 콘크리트에 얕은 기단을 만들고 위에 거북 모양 좌대를 놓은 뒤 흑요석 화강암의 규형(圭形) 비신(碑身)을 세웠다. 거북 좌대의 크기는 정면 길이 194㎝, 옆면 길이 276㎝이며 비신은 높이 180㎝, 너비 58㎝, 두께 29㎝이고, 비석 몸체 상단은 가로 85㎝, 높이 62㎝, 두께 53㎝의 용두형(龍頭形) 덮개를 얹어 장식하였다. 주변에 보호책으로 철주를 세웠다가 철거하였다.

[금석문]

비의 정면에 ‘구인정 유허비(九印亭遺虛碑)’라 새겼는데, 글자의 크기는 가로, 세로 각각 13㎝이며, 양쪽 모서리와 뒷면에 한자로 비문이 새겨져 있다. 비문의 내용은 정자나무를 심은 형조참판 최정의 행적과 그의 아들 및 조카 아홉 명의 훈적(勳績)을 기록하였다. 비석 본문의 글자 크기는 가로, 세로 각각 3㎝이며, 끝에 ‘후손 제호(濟浩) 근찬(謹撰)’이라 새겼다.

[현황]

구인정 유허비하동군 옥종면북천면에 거주하는 아홉 인물 후손들이 정성껏 관리하여 보존 상태가 양호하나, 한자로 새겨진 비문을 현실적으로 해득하는 사람이 드물다.

[의의와 평가]

구인정 유허비의 주인공 중에는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군수 최기변, 진주성 싸움에서 순절한 진주판관 최기필, 병자호란 때 청나라 오랑캐의 신하가 될 수 없다며 항거한 최탁 등이 포함되어 있는데 역사적 인물들의 흔적을 귀감으로 전하는 의미 있는 유적이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