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4014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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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敦均 |
영어음역 | Jeong Dongyun |
이칭/별칭 | 국장(國章),해사(海史)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 안계리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전병철 |
출생 시기/일시 | 185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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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년 시기/일시 | 1941년 |
출생지 |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 안계리 |
묘소|단소 | 경상남도 진주시 마동 홍복산 |
성격 | 학자 |
성별 | 남 |
본관 | 진양 |
[정의]
근대 하동 출신의 유학자.
[가계]
본관은 진양(晉陽). 자는 국장(國章), 호는 해사(海史). 고려조 통례문지후(通禮門祗侯) 정신(鄭侁)의 후손이다. 고조할아버지는 정간(鄭幹)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입재(立齋) 정종로(鄭宗魯)의 문인인 허재(虛齋) 정지탁(鄭志倬)이고, 할아버지는 화헌(化軒) 정주윤(鄭周贇)이다. 친아버지는 반와(盤窩) 정택시(鄭宅蓍)이며, 친어머니는 성준(成準)의 딸인 창녕 성씨(昌寧成氏)이다. 백부에게 양자로 들어갔으니, 양아버지는 정택화(鄭宅華)이며, 양어머니는 박영제(朴榮濟)의 딸인 태안 박씨(泰安朴氏)이다. 부인은 최경진(崔慶鎭)의 딸인 전주 최씨(全州崔氏)이며, 그 사이에 1남 4녀가 있다.
[활동 사항]
정돈균(鄭敦均)은 1855년(철종 6) 지금의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 안계리에서 태어났다. 월촌(月村) 하달홍(河達弘)에게 수학했는데, 당시 고모부 동료(東寮) 하재문(河載文)이 모한재의 이웃집에 우거하며 배우고 있었고, 월고(月皐) 조성가(趙性家)와 계남(溪南) 최숙민(崔琡民) 등도 함께 수학하였다. 하달홍이 죽은 후 하재문의 아들인 극재(克齋) 하헌진(河憲鎭)과 더불어 10여 년간 모한재를 지키며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학문을 닦았다. 그 뒤 하헌진과 같이 후산(后山) 허유(許愈), 물천(勿川) 김진호(金鎭祜),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 등에게 나아가 종유하였다.
1901년 안계리에서 원해촌으로 이거하여 해사려(海史廬)를 짓고 형 운파(雲坡) 정한균(鄭漢均)[1854~1917]과 함께 학문과 수양에 힘쓰며 여생을 보냈다. 정한균은 천성이 순후하고 효우가 돈독하였는데, 아버지가 병이 들어 6년 동안의 시탕(侍湯)에도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학문을 부지런히 닦았으며, 예서(隸書)에 조예가 깊었다. 당시 운곡(雲谷)에서 팔재사(八才士)로 일컬어지는 이들 중 한 명이 정한균이다.
정돈균은 9세에 친아버지의 상을 당하였는데, 할머니 하유인(河孺人)이 매우 상심하여 식사를 들지 않자 울면서 미음을 받들고 무릎을 꿇고 나아가 맛보기 전에는 감히 물러나오지 않았다. 11세 때인 1865년(고종 2) 가을에 비바람이 크게 몰아쳐 나무가 부러지고 집이 넘어졌다. 할머니가 친아버지와 친어머니의 묘소가 무사한지 염려하는 말을 하자, 정돈균은 즉시 일어나 묘소로 향하였다. 칠흑같이 어둡고 길은 막혔으며 기와가 날아와 떨어지는 상황 속에서도 어렵사리 도착하여 묘소가 무사한 것을 보고는 돌아와 할머니에게 전하였다.
[학문과 저술]
문집으로 『해사유고(海史遺稿)』 2권이 있으며, 문집에는 시(詩), 서(書), 잡저(雜著), 제문(祭文), 행장(行狀), 묘갈명(墓碣銘) 등 여러 글이 실려 있다.
[묘소]
묘소는 경상남도 진주시 마동 홍복산(洪福山)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