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4019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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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趙性宙 |
영어음역 | Jo Seongju |
이칭/별칭 | 계호(季豪),월산(月山)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상남도 하동군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전병철 |
출생 시기/일시 | 184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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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872년 |
활동 시기/일시 | 1901년 |
몰년 시기/일시 | 1918년 |
출생지 |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 월횡리 |
묘소|단소 |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 회신리 상촌 |
성격 | 유학자 |
성별 | 남 |
본관 | 함안(咸安) |
[정의]
개항기 하동 출신의 유학자.
[가계]
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계호(季豪), 호는 월산(月山). 어계(漁溪) 조려(趙旅)[1420~1489]의 후손이다. 고조할아버지는 조원기(趙元耆)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조경진(趙經鎭)이다. 증조할아버지가 처음으로 진주 월횡리(月橫里)로 이주하여 정착하였다. 할아버지는 조오(趙澳)이고, 아버지는 동몽교관(童蒙敎官) 조광식(趙匡植)이며, 어머니는 김석신(金錫信)의 딸 김해 김씨(金海金氏)이다. 4남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부인은 하일운(河一運)의 딸 진양 하씨(晉陽河氏)이며, 그 사이에 2남 2녀를 두었다.
백형(伯兄)은 당대의 이름난 학자인 월고(月皐) 조성가(趙性家)[1824~1904]이며, 중형(仲兄)은 횡구(橫溝) 조성택(趙性宅)[1827~1890]이다. 조성택은 숙부 조상식(趙相植)과 숙모 이종식(李宗式)의 딸인 이씨가 모두 일찍 별세하여 아버지의 뜻에 따라 양자로 들어갔다. 나이 50세가 넘어 생부의 상을 당하자 여묘를 하였으며, 60세 무렵에 생모의 상을 당하여서도 똑같이 행하였다. 사람들이 그의 효행에 감동하여 그가 건너다닌 시내를 ‘효자도(孝子渡)’라고 하였으며, 여묘를 한 산을 ‘효자도(孝子道)’라고 칭송하였다. 이 일이 조정에 알려져 교관(敎官)에 추증되었다. 문집으로 『횡구집(橫溝集)』이 있다.
[활동 사항]
조성주(趙性宙)[1841~1918]는 어릴 적에 조성택에게 글을 배웠다. 1872년(고종 9) 32세의 나이로 백형 조성가를 따라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1798~1876]의 문하에 나아가 제자의 예를 행하였다. 1881년(고종 18) 스승의 상을 당하였는데, 당시 그는 상중에 있었으므로 예설(禮說)에 근거하여 사복(師服)을 입고서 장례에 나아갔다. 1901년(고종 38) 『노사전집(蘆沙全集)』을 강성(江城)의 신안재(新安齋)에서 중간하였을 때 참여하여 일을 주선하였다.
전집이 간행되자, 노사의 성리설이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설과 다르다는 이유로 비난하는 여론이 일어났었다. 이때 조성주는 “옛 선현들도 이러한 일을 당한 것이 많습니다. 공론(公論)은 백세(百世) 이후를 기다려야 할 것이니, 저들과 어찌 다투어 변론할 필요가 있겠습니까?”라고 말하였다.
1895년(고종 32) 명성 황후가 시해되는 변고가 일어나자, 백형 조성가가 지리산 중산리로 이주해 은거하였다. 조성주는 집에서 50리나 떨어져 있고 가는 길이 험한 데도 해마다 서너 차례씩 백형을 찾아가 안부를 여쭙고 돌아왔다. 그 역시 나라가 국권을 잃고 난 후 세상에 살고 싶은 뜻이 없어 사림산(士林山)의 산재(山齋), 장성(長城) 백양산(白羊山)의 승사(僧舍), 남해의 금산(錦山), 지리산의 일월대(日月臺) 등지를 떠돌며 탄식을 토하고 울분을 달래었다. 옛사람의 격언(格言)을 손수 써서 벽에 붙여 놓고 항상 보면서 자신을 살폈다.
[학문과 저술]
저서로 문집 『월산유고(月山遺稿)』 5권 3책이 있다.
[묘소]
묘소는 하동군 옥종면 회신리 상촌(上村)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