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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400357
한자 烽燧
영어의미역 Beacon Fire Station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남도 하동군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박용국

[정의]

조선 시대 경상남도 하동군에 두었던 불과 연기를 이용한 통신 수단과 시설.

[개설]

봉수(烽燧)는 횃불[烽]과 연기[燧]로 변방의 위급한 상황을 본읍(本邑)과 중앙에 전달하던 군사적 목적의 통신 수단과 시설로서 고대부터 1894년까지 사용되었다. 봉수제는 중국에서 유래했으며, 우리나라에도 이미 삼국 시대에 도입되었을 것으로 추정하지만 확실한 기록은 12세기 초기에 보인다.

1123년(인종 1) 송나라 서긍이 고려에 사신으로 왔다가 남긴 『고려도경(高麗圖經)』에 고려의 봉수제가 나오며, 1149년(의종 3) 서북면병마사 조진약(曺晉若)이 임금에게 올린 글에서 네 단계의 거화수(炬火數), 봉수군(烽燧軍)의 수와 토지 지급액을 규정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 시대 봉수제는 고려 시대의 봉수제를 계승하여 세종 대에 이르러 봉수의 거수(炬數)로 신호하였다. 즉 평상시에 횃불 1개, 적이 나타나면 횃불 2개, 적이 국경에 접근하면 횃불 3개, 국경을 침범하면 횃불 4개, 전투가 벌어지면 횃불 5개로 각각 신호하였다. 봉화군의 정원, 연변 봉수의 연대(烟臺) 축조, 봉수 선로의 획정 등 봉수제의 여러 규정을 정비·강화하여 1447년(세종 29) 무렵에 제도가 확립되어 『경국대전(經國大典)』의 규정으로 확정되었다.

봉수는 위치와 역할에 따라 경봉수(京烽燧)[전국의 모든 봉수가 집결하는 중앙 봉수로서 한양의 목멱산 봉수]·연변 봉수(沿邊烽燧)[해륙·변경의 제l선에 위치하여 연대라고도 함]·내지 봉수(內地烽燧)[경봉수와 연변 봉수를 연결하는 중간 봉수]로 나뉜다.

전국의 봉수망은 간선(幹線)인 5개의 직봉(直烽) 노선과 보조선인 간봉(間烽) 노선이 있었다. 직봉은 동북쪽에서 경흥, 동남쪽에서 동래, 서북쪽의 내륙 지방에서 강계, 해안 지방에서 의주, 서남쪽에서 순천을 그 기점으로 삼았으며, 종착점을 서울 목멱산(木覓山)[남산]으로 하였다. 간봉은 연변 봉수로부터 직봉선의 사이사이에 중간 역할을 하는 것과 연변 봉수에서 직접 본진(本鎭)이나 본읍에 이르는 단거리의 것이 있다.

조선 시대 봉수대 수는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 의하면 직봉 402개소, 간봉 271개소로 총 673개소였다. 각 봉수대 사이의 거리는 가장 중요한 연변 봉수의 거리가 가장 짧아 10~15리 이하로 조밀하게 배치되었고, 내지 봉수로 옮겨갈수록 서로 간의 거리가 멀어졌다.

하동 지역의 봉수대는 두우산 봉수·연대 봉수대·하동 금오산 봉수대·정안봉 봉수·악양 봉수대 등 다섯 군데 정도로 알려져 있다. 하동의 봉수대는 남해에서 내륙으로 이어지는 간봉 노선이었다. 두우산 봉수·연대 봉수대는 연변 봉수이고, 나머지 네 곳은 내지 봉수에 해당하였다. 하동의 봉수는 남해에서 올라오는 봉수를 받아 직봉에 연결시켜주거나 본읍에 위급 상황을 알려주는 기능을 하였다.

[관련 기록]

하동 지역의 봉수에 관한 기록은 『여지도서(輿地圖書)』 하동현 봉수조(烽燧條)를 보면 봉수가 없다고 나온다. 이외에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등에도 하동의 봉수에 관한 기록이 없다.

[두우산 봉수]

두우산 봉수경상남도 하동군 금성면 궁항리고포리 경계의 두우산 정상에 위치한다. 두우산 봉수대는 남해 금산 봉수와 하동 금오산 봉수대를 연결하거나 섬진강 하구의 남해 바다를 감시하던 연변 봉수로서 간봉 노선[주요 간선 다섯 개 길의 직봉에 들지 않는 작은 봉수 조직]이었다.

봉수대 유허에 장방형의 건물지와 담장이 남아 있을 뿐 아니라 연대의 흔적도 남아 있다. 장방형 건물지에 남아 있는 담장 외측에 1.6m의 석축을 쌓았고, 동쪽에는 직경 3.4m, 두께 0.6m, 외곽 축대 높이 1.6m의 작은 원형 석축이 있다. 연대의 규모는 둘레 28m, 남북 직경 9.7m, 동서 직경 6.5m, 북쪽면 높이 2.1m가 남아 있다.

[연대 봉수대]

연대 봉수대경상남도 하동군 금남면 노량리 뒷산 연대봉에 위치한다. 연대 봉수대는 연변 봉수이자 남해 금산과 하동 금오산 봉수대를 이어주는 간봉의 역할을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내외 석성으로 된 봉수대로서 외성의 규모는 외성이 15.5m이고, 내성은 5.4m이다. 성곽의 잔존 높이는 1m~3m이다.

[하동 금오산 봉수대]

하동 금오산 봉수대경상남도 하동군 금남면에 있는 높이 849m의 금오산 능선에 위치한다. 금오산 봉수대는 남해안의 한려수도가 정면에 보이는 전략상 요충지에 위치하여 남해 금산과 본읍에 위급 상황을 알려주는 간봉의 역할을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봉화 터와 봉수대의 형태가 잘 남아 있는데, 둘레 200m 정도의 석축이 남아 있고, 봉수대 안에는 봉수군이 머물던 곳으로 보이는 석굴이 있다. 석굴은 높이 3m, 가로 3m, 세로 2m로 그 위에는 큰 돌로 막은 듯한데 지금은 부처를 모신 불단으로 사용하고 있다. 남아 있는 봉돈은 길이 2m, 폭 1.5m의 타원형으로, 봉수대의 아래쪽에 입구가 있어 불을 점화하게 되어 있다.

[정안봉 봉수]

정안봉 봉수경상남도 하동군 고전면 성천리 산 1-1번지 정안봉 정상에 위치한다. 북으로는 횡천면으로 한때 하동군의 읍치가 있었던 곳이고 동으로 양보면 장암리, 남으로 하동읍성이 있는 고전면이 위치한다. 정안봉 봉수는 상당히 전략적인 곳에 위치하여 하동 금오산의 봉수대를 악양 쪽으로 연결하는 간봉 노선에 위치하였던 것이다. 정안봉 산성 축성과 동시에 축조된 봉수대라 추정하지만 봉수대의 석재만 확인할 수 있을 뿐 그 흔적을 제대로 확인할 수 없다.

[악양 봉수대]

악양 봉수대경상남도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 칠성봉[900m]에 위치한다. 악양 봉수대는 서쪽으로 섬진강과 남으로 정안봉 봉수를 관찰하기 쉽도록 상당히 높은 곳에 위치한다. 하동의 내지 봉수로서 간봉이었다. 악양 봉수대가 위치하는 평사리는 일찍이 섬진강 물길을 장악하기 위한 하동 고소성이 위치하여 전략적으로 중요한 곳이어서 그 축조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상당히 이른 시기에 축조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봉수대의 망대나 연대의 흔적은 확인할 수 없으나 거기에 쓰였던 석재로 생각되는 돌무지가 널리 분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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