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4019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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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崔兢敏 |
영어음역 | Choe Geungmin |
이칭/별칭 | 시중(時仲),신암(愼庵)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상남도 하동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전병철 |
출생 시기/일시 | 188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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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년 시기/일시 | 1970년 |
출생지 | 경상남도 사천시 정동면 수청리 |
거주|이주지 |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 청룡리 |
묘소|단소 |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 용수동 |
성격 | 유학자 |
성별 | 남 |
본관 | 삭녕(朔寧) |
[정의]
근대 하동 지역에서 활동한 유학자.
[가계]
본관은 삭녕(朔寧). 자는 시중(時仲), 호는 신암(愼庵). 고려 때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최천로(崔天老)가 시조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최윤진(崔允鎭)이며, 할아버지는 최익상(崔益祥)이다. 아버지는 수정(洙亭) 최효근(崔孝根)이고, 어머니는 정도인(鄭道仁)의 딸 진양 정씨(晉陽鄭氏)이다. 부인은 한진완(韓鎭完)의 딸 청주 한씨(淸州韓氏)이며, 그 사이에 2남 3녀를 두었다.
[활동 사항]
최긍민(崔兢敏)[1883~1970]은 경상남도 사천시 정동면 수청리에서 태어났다. 타고난 자품이 단아하였으며, 어릴 적부터 어른이 권면하지 않아도 스스로 열심히 공부하였다. 어느 날 이웃 아이들과 윷놀이를 하였는데, 아버지가 보고 꾸짖자 즉시 버리고 일어난 뒤 평생 잡기를 가까이하지 않았다고 한다.
13세 때 아버지를 따라 진주의 운곡(雲谷)[현 하동군 옥종면 청룡리]으로 옮겨와 살았다. 1900년(고종 37) 할머니의 상을 당하였는데, 밤낮으로 여묘를 하는 아버지를 모시며 곁에서 떠나지 않았다. 3형제 중에서 둘째로 태어나 형제와 우애를 돈독히 하였으며, 가난한데도 형제가 힘을 모아 부모님의 봉양을 극진히 하였다.
고모부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1846~1919]의 문하에 나아가 수학하였다. 1910년 국권 피탈을 당하자 두문불출하고 오직 학문에 몰두하였다. 당시에 단발령이 내려져 단속이 혹독하였는데, 최긍민은 “나라는 망할 수 있어도 도(道)는 망할 수 없으며, 머리를 자를 수는 있어도 머리카락을 자를 수는 없다”라며 매우 강경하게 저항하였다. 그리하여 왜경이 그를 체포하였지만 끝까지 굽히지 않았으며, 풀려난 후에는 지리산 깊은 골짜기로 들어갔다.
해방된 후 1952년 형제들이 힘을 합쳐 평생 곤궁하게 살면서도 학문의 길에 전념하였던 아버지 최효근을 위해 하동군 옥종면에 운양재(雲養齋)를 지었다. 그리고 매년 봄에 여러 사우(士友)들과 함께 강회(講會)를 정하여 이곳에서 모임을 열었다.
[학문과 저술]
저서로 문집 『신암집(愼庵集)』 4권 2책이 있다.
[묘소]
묘소는 하동군 옥종면 용수동(龍水洞)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