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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700461
한자 近代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전라북도 군산시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정원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개항 시기/일시 1899년 5월 1일 - 군산항 개항
전개 시기/일시 1899년 6월 2일 - 군산 거류지 조성
전개 시기/일시 1901년 3월 - 군산 일본 민회 조직
개칭 시기/일시 1906년 8월 - 군산 일본 민회에서 군산 거류 민단으로 개칭
전개 시기/일시 1907년 3월 - 국채 보상 운동 전개
설립 시기/일시 1908년 5월 4일 - 대한협회 군산지회 설립
설립 시기/일시 1909년 10월 - 호상관 상회 조직
제한 시기/일시 1910년 - 강제 병합 이후 객주 취체 규칙과 조선 회사령 등으로 상회사 설립 제한
병합 시기/일시 1910년 8월 29일 - 일제에 강제 병합
설립 시기/일시 1910년 - 임옥 수리 조합 설립
설립 시기/일시 1916년 - 군산 상업 회의소 설립
설립 시기/일시 1920년 - 익옥 수리 조합 설립
설립 시기/일시 1932년 - 군산 미곡 취인소 설립

[정의]

1867년 개항 이후 1945년 8월 15일 해방에 이르기까지 전라북도 군산 지역의 역사.

[개설]

옥구현에 속했던 군산은 개항 이후 형성된 각국 거류지를 중심으로 일본인들이 이주하면서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전라북도와 충청남도라는 넓은 평야 지대를 배경으로 하고 금강과 서해안이 인접한 지리적 이점으로 지주와 상업 자본가들이 집중되며 도시의 기반 시설이 갖추어 지기 시작하였다.

강제 병합 이후에는 군산과 옥구·임피 등 인근 지역에 설립된 일본인 농장들을 통해 생산된 미곡이 군산항에 집산되어 일본으로 이출되기 시작하였다. 일본인 농장에 소속되었던 군산 지역 자작농들은 일제의 정책과 지주의 핍박으로 소작농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소작농으로 전락하자 군산역군산항에 몰려들어 일용 노동자 및 하역 노동자로 삶을 살아가거나, 만주나 연해주로 이주하였다.

전시 체제기에 들어가는 1930년 이후에는 기존의 철도·도로·항만 등의 재정비를 통해 전쟁에 필요한 식량을 생산해 낼 수 있는 시설 확충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는 일제의 전쟁수행을 위해 이루어진 것으로, 군산 지역 주민의 삶은 힘든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일제의 수탈과 핍박에 맞서 독립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1919년 3·1 운동이 전개될 당시 군산 영명 학교 학생과 교사가 중심이 되어 만세 운동을 전개하였다. 1920년 이후로는 사회 주의 사상의 영향으로 노동 운동·농민 운동을 통한 독립 운동이 군산에서 진행되었다.

[군산항 개항]

군산은 개항 이전 옥구현(沃溝縣) 북면(北面)에 속했었다. 인근 지역에서 집산되는 세곡을 운송하기 위한 군산창(群山倉)·성당창(聖堂倉)이 설치되어 있었고, 고군산군도와 군산에는 해역 방어와 조운을 담당하기 위한 수군 진(鎭)이 설치되어 있는 인구 1,300여명 정도의 작은 고을이었다.

개항 전 위와 같은 규모였던 군산은 1899년(광무 3) 5월 1일 개항 이후 변화하기 시작했다. 군산 개항은 대한 제국이 상업을 통해 국가 발전을 이룩할 목적으로 이루어졌다. 이후 6월 2일 외무 대신 박제순(朴齊純)과 외국 대표 사이에 조인된 각국 조계 장정에 의해 거류지가 조성되었다.

[군산 각국 거류지]

군산에 조성된 거류지는 각국 거류지로 대한 제국과 조약을 맺은 외국에 개방된 지역이었다. 하지만 군산 각국 거류지에는 일본인이 다수를 점하는 가운데 소수의 중국인만으로 구성되어 일본인 전관 거류지나 다름없었다. 이 지역 안에서 일본인들은 대한 제국의 통제를 받지 않는 치외 법권을 바탕으로 각종 행정 사무를 스스로 처리하였다. 이어 1901년(광무 5) 3월 군산 일본 민회(群山日本民會), 1906년(광무 10) 8월에는 군산 일본 민회를 개칭한 군산 거류 민단을 조직하여 일본인들의 이익을 확보할 수 있는 행동을 전개해 나갔다.

군산 거류 민단을 중심으로 재류 일본인 보호와 상업과 정착에 필요한 각종 시설물들이 설립되기 시작하였다. 시설물 설치를 위해 군산 각국 조계지 안에 있던 수군 만호진(水軍 萬戶鎭)은 철거되었고, 관공서, 병원, 공원 등의 시설이 설립되었다. 이와 같은 변화와 미곡의 생산과 집산이라는 지리적 이점으로 인해 일본에서 농부, 자본가, 지주, 변호사, 의사 등이 군산에 이주하기 시작하였다.

[개항기 군산 지역 객주 활동]

개항 이후 군산에 정착하기 시작한 일본인들은 조계 지역을 중심으로 미곡상, 정미소, 양조장 등을 경영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토지에 대한 수탈이 가속화 되며 구마모토[熊本]·미야자키[宮崎]·오쿠라[大倉]와 같은 대형 농장들이 설립되었다. 이들의 활동을 보호·촉진하기 위해 군산 농사 조합(群山農事組合)과 일본인 상공 회의소가 설립되어 영향력을 넓혀 나갔다.

이에 대응해 군산 지역 객주들은 상회사를 조직하여 상업 발전을 꾀하였다. 대한 제국 정부에서는 객주의 활동을 보장하여 수세 확보와 상업 발전을 꾀하기 위해 상회사 설립을 지원하였다. 이에 영흥사(永興社), 한흥사(韓興社), 광흥사(廣興社)와 같은 상회사들이 군산에 설립되었다.

하지만 이들 상회사는 러일 전쟁 종료 후 일본의 간섭으로 정부 지원이 차단과 외획폐지로 발전 가능성을 차단 당하고 해체되었다. 이어 1909년(융희 3) 10월 호상관 상회(湖商館商會)를 조직하여 객주 업자의 협동과 상업 발전을 도모했으나, 1910년(융희 4) 강제 병합 이후 객주 취체 규칙과 조선 회사령 등으로 상회사의 활동과 설립이 제한되며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차단당했다.

[일제 강점 이전 군산 지역 국권 회복 운동]

개항 이후 군산으로 일본인 지주와 상공업자의 침투가 계속되며, ‘을사 늑약’ 이후 한국에 대한 일제의 영향력이 강해지면서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일제의 경제적 예속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국채 보상 운동, 실력 양성을 위한 자강 운동, 일제에 대한 무력 투쟁을 전개한 의병 전쟁이 그것들이다.

군산에서 국채 보상 운동은 1907년(융희 1) 3월부터 전개되었는데, 군산 객주 상회사(群山客主商會社)와 군산항 신상 회사(群山港紳商會社) 같은 상회사가 중심이 되었다. 이들 상회사에서는 일제에게 진 국채를 반환할 목적으로 국채 보상 의무사를 조직하였고, 군산 지역 주민들을 대상으로 의연금 모집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실력 양성을 통한 국권 회복을 목적으로 1908년(융희 2) 5월 4일에는 대한 협회 군산 지회가 설립되었다. 설립에 참여한 인사들은 군산·옥구 지역 대지주와 객주 상회사 대표들이었다. 설립 이후 계몽운동과 상업 장려를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군산에서 활동한 의병장으로는 남광원(南光元)·김동구(金東九)·박이환(朴駬桓)·양창서(梁昌西)·서여장(徐汝長)·신내선(申乃善) 등이 있었다. 이들은 일제의 행정·사법 기관 및 상업 시설과 일본인 대농장이 집중되어 있는 군산 지역 수탈 시설에 타격을 주는 활동을 전개하여 피해를 입혔다.

[일제 강점기의 군산]

1. 행정 구역 개편과 변화

1910년(융희 4) 8월 29일 일제에 강제 병합된 이후 한국에는 조선 총독부가 설립되었다. 이후 식민 행정에 필요한 각종 제도들이 시행되었다. 군산은 1914년 행정개편으로 군산부(群山府)가 되었고, 이전부터 존재했던 군산 거류 민단은 해체되었다.

군산부는 일본인들이 중심이 된 정(町)과 한국인들이 중심이 된 동(洞)으로 구분되어졌다. 일본인이 거주하는 정에는 학교, 도로, 가로등, 하수도 등과 같은 정주여건이 잘 조성되었는데, 한국인이 거주하는 지역에는 이러한 사회 간접 시설들이 갖추어지지 않았다. 이런 문제는 지속적으로 이어졌고, 이를 개선할 것을 요구하는 군산 부민 대회가 개최되기도 하였다.

2. 일본인 농장 설립과 미곡 수탈

군산부에 있는 일본인들은 미곡상과 지주들이 중심이 되는 가운데 조선 토지 조사령, 회사령, 산미 증식 계획 등 제반 정책에 힘입어 1920년 이후 군산 지역 농토 및 자본을 잠식하였다. 웅본 농장·불이 농장·궁기 농장·천기 농장과 같은 대형 농장들은 계속 설립되었다. 1910년 임옥 수리 조합, 1916년 군산 상업 회의소, 1920년 익옥 수리 조합, 1932년 군산 미곡 취인소같은 미곡 수탈을 위한 시설들도 들어섰다. 이와 같은 환경으로 미곡 생산량은 이전보다 증가하게 되었다. 하지만 생산된 미곡들은 한국인들에게 돌아가지 않고, 군산항을 통해 일본의 오사카[大阪], 고베[神戶], 도쿄[東京] 지역으로 수탈되었다. 이러한 미곡 수탈은 일제 강점기 동안 계속되었다.

3. 전시 체제기 이후 군산

일제가 중국 침략을 본격화하는 1936년 이후 한국은 전쟁 수행에 필요한 물자를 공급하는 전락지로 변모되었다. 군산도 전시체제기에 들어서면서 전쟁수행에 필요한 물자를 생산해내는 지역으로 변화되었다.

구라시키[倉敷] 인견 회사(人絹會社) 군산 공장에서는 군복 제작에 필요한 면을 가공하였다. 군수품 생산 공장에 전기와 공업 용수를 안정적으로 공급하기 위해 남조선 전기 주식회사(南朝鮮電氣株式會社)·군산 화력 발전소(群山火力發電所)가 활용되었다. 태평양 전쟁에 들어서면서는 전쟁 현장에 필요한 병력과 노무자 확보를 인한 징용·징발에 군산 지역 주민들이 강제 동원 되었다. 군산 시가지는 전쟁 수행에 맞는 방어 기지로 변모되었다.

4. 군산 지역 항일 독립 운동

3·1 운동이 전국적으로 진행될 당시 군산에서는 양명 학교 교사와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의 만세 운동은 인근 옥구·임피 지역에 영향을 주어 만세운동이 연이어 일어날 수 있게 되었다.

3·1 운동 이후 통치 방식의 변화를 준 일제는 문화 통치를 시작하였고, 국외에서 사회 주의 사상이 국내로 유입되기 시작하였다. 군산은 일제의 자본에 의해 부두와 역에 근무하는 노동자와 농장에 있는 농민들이 많았기에 노동 운동·농민 운동이 전개되기에 유리하였다. 조용관(趙容寬)·차주상(車周相) 같은 지역 지식인들은 사회 주의를 받아들여 민족 독립 운동의 한 방법으로 이용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1920년~1930년 중반까지 군산에서는 정미소, 철도·부두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일제 자본가에 대항하는 파업투쟁이 전개되었다.

일본인 지주들의 고율 소작료와 일방적 소작권 이동에 반대하는 소작쟁의도 1920년 이후 1930년 중반까지 지속되었다. 특히 1927년 진행된 옥구 이엽사 농장의 소작 쟁이는 지역 농민 조합이 중심이 되어, 경제적 투쟁을 넘어 민족 독립을 위한 방편으로 진행되었다.

[참고문헌]
이용자 의견
군** 내용에 오타 및 띄어쓰기 등 오류가 너무 많습니다. 비 전문가가 인용한 글이라도 교정은 거쳐 게시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 답변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을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2020.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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