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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주 상회사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700464
한자 客主商會社
이칭/별칭 상회사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전라북도 군산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정원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설립 시기/일시 1899년 - 순흥사 설립
설립 시기/일시 1900년 - 영흥사 설립
설립 시기/일시 1900년 7월 - 어염 회사 설립
설립 시기/일시 1903년 2월 - 어상 회사 설립
설립 시기/일시 1903년 5월 - 군산객주조합 설립
설립 시기/일시 1903년 10월 - 창성사 설립
해체 시기/일시 1906년 3월~12월 - 창성사 해체
병합 시기/일시 1908년 10월 - 군산 객주 상회사와 군산항 신상 회사, 군산 신상사로 통합
설치 시기/일시 1908년 12월 - 객주조합소 설치
설립 시기/일시 1909년 10월 - 호상관상회 창립
성격 객주 단체

[정의]

개항 이후 일본 상인의 경제적 침탈에 대응하고 상업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군산 지역 객주들이 중심이 되어 설립한 객주 단체.

[상회사 설립 배경]

조일 수호 조규(朝日修好條規) 체결 이후 일본의 간섭 아래 부산항, 원산항, 인천항이 개항되었다. 개항된 각 항구에는 일본인 전관 거류지가 설정되고, 그 곳을 중심으로 일본은 각종 기관을 설립하며 침략에 필요한 기반을 다져나갔다.

일본의 이러한 모습에 대응하여 대한 제국은 새로운 개항지를 선택하였고, 그곳에서 일본의 간섭을 배제하여 각국 간의 세력 균형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그를 바탕으로 대한 제국 정부는 재정의 안정과 식산 흥업의 주도권을 행사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러한 계획은 1899년(광무 3) 5월 1일 군산항 개항에 그대로 투영되었다.

먼저 군산항에서 거래되는 물품에 대한 세관 수입을 올리고 객주들에게 세금을 납부하게 하여 재정 안정에 노력을 기울였다. 이는 군산 지역 객주들이 가지고 있던 기존 권리를 인정하고, 내장원에 백일세(百一稅)를 납부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다음으로 일본 상인의 침탈에 대항하기 위해 군산항에 이전 개항지와 달리 일본인 전관 조계지를 설정하지 않고 공동 조계지를 설정하여 일본 상인의 침탈에 대비하였다.

대한 제국과 군산 지역 객주는 이를 안정적으로 실천하기 위해 상회사 설립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즉, 대한 제국에서는 개항장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객주들의 권리인 도고권을 인정하고, 객주들은 대신 내장원에 납세 의무를 지게 하였다. 이를 통해 객주들은 정부의 보호 아래 지방관·토호·외세의 간섭 없이 상업 활동에 종사할 수 있었다. 이러한 모습은 상회사 설립을 통해 구체적 모습을 나타내 보였다.

[개항 이후 군산 지역 상회사의 설립]

군산항 개항 직후 군산 지역 객주는 일본인 상인들로부터 피해를 받을 것을 예상하고 정부의 지원 아래 상회사 설립에 주력하였다. 어민을 선두로 한 일본인들은 개항 이전부터 군산의 서빈(西濱)을 중심으로 이미 들어와 정착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일본 상인들은 어물 문옥업(魚物問屋業) 등을 통해 상품 매입·판매 활동을 시작하여, 기존 군산 지역 객주 활동 영역을 침범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군산 객주들은 상회사를 설립하여 대응하려 나갔다. 그것은 외국 상인과 부상(富商)의 전리(專利)에 대항하여 상권을 지키려는 목적에서 이루어졌다.

먼저 1899년(광무 3) 9월 군산항 객주 김이제(金伊濟), 정인식(鄭寅植), 김공제(金恭濟), 곽규영(郭奎榮), 조중필(趙重弼), 정문칠(鄭文七) 등이 농상공부에 순흥사(順興社) 설립을 청원하였다. 이들은 외국 상인들과 부상들의 상업상 침탈과 지방 관아의 수탈에서 벗어나고 자신들의 상권을 지키기 위해 인천과 동래의 객주 상회사를 모방하여 객주 회사인 순흥사(順興社)를 설립하려 하였지만 계획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후 군산 지역 객주들은 1899년(광무 3) 말 궁내부의 허가를 얻어 영흥사(永興社)를 설립하였다. 설립 이후에는 영흥사 운영과 관련된 영흥사 장정(永興社章程)이 마련되었다. 영흥사에서는 군산항과 경포의 객주들을 관할하였으며, 대소 사무를 살피고 거래 상품에 조세를 매겨 수취하는 활동을 펼쳐나갔다.

‘영흥사 장정’에 나타난 영흥사의 운영과 관련된 내용을 살펴보면 본사는 군산항에 두었고 경포를 하부에 두고 있었다. 봄·가을 두 번에 걸쳐 매년 600원(元)을 궁내부에 상납하였고, 궁내부에서는 영흥사를 외국 상인과 부상으로부터 보호하였다. 초대 사장은 신현기(申鉉琦)가 역임하였고, 임원은 사장 1인, 부사장 1인, 총무원 2인, 재무 2인, 간사 5인, 서기 2인, 사환 5인으로 구성되었다. 수세 대상으로는 곡물, 해산물, 소금 등 다양한 품목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는 영흥사가 군산에서 거래되는 물종 대부분에 과세한 원칙이 반영된 것이다.

영흥사 이외의 상회사로 거간 도중(居間 都中)이 중심이 된 한흥사(韓興社)와 여타 객주들이 설립한 광흥사(廣興社)가 있었다. 이들 상회사는 영흥사가 거간들에게 돌아갈 구문을 늑탈하고, 거간 도중을 혁파한 사실 및 영흥사 객주에게만 일방적인 혜택과 특권이 있는 것에 대해 크게 반발을 하였다. 이에 한흥사는 자신들도 내장원에 부속시켜 보호를 해줄 것을 요구하며 매년 2천 냥을 상납할 뜻을 밝혔다. 이에 내장원에서는 한흥사를 내장원에 부속시켰다.

[일본의 간섭과 영흥사의 변화]

영흥사는 객주의 도고권 보장과 황실 재정 수입의 증대라는 목표 아래 설립된 회사였다. 이후 궁내부는 이런 설립 취지에 맞추어 영흥사를 적극 보호하였다. 그러나 영흥사 설립과 수세 활동은 일본과의 외교 분쟁 및 일부 객주와 거간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일본 영사관과 상인들은 통상 장정에 어긋난다고 반발하며 백일세 폐지를 요청하였다. 영흥사 창립에 참여하지 못한 객주들도 백일세 폐지를 촉구하였다.

내장원에서는 일본 영사관의 항의와 영흥사 이외의 객주와 거간들이 반발이 심해지자 군산 상회사 문제에 적극 개입하기 시작하였다. 영흥사 영업에 방해가 되는 광흥사를 혁파하고, 이미 허가를 받은 한흥사는 영흥사에 부속시키는 조치를 취하였다.

1903년(광무 7) 4월에는 영흥사를 내장원이 구관하는 상회사로 다시 한 번 설립하고, ‘영흥사 이정 장정(永興社釐正章程)’을 마련하였다. 새롭게 마련된 ‘영흥사 이정 장정’에는 상납액이 이전보다 증가되었고, 수세 대상을 백미(白米)와 정조 잡곡(正租雜穀)으로 제한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일본 영사관의 요구와 광흥사 및 한흥사의 청원을 일부 수용한 것이었다.

내장원에서 이렇게 수세 규정에 변화를 주면서 영흥사를 유지시키려 했던 이유는 객주 간의 경쟁 및 객주와 거간의 대립을 완화하여 외국 상인의 침탈로부터 상회사를 보호하고 조세를 안정적으로 확보하고자 하는 배경이 있었다. 그렇지만 객주들의 계속되는 반발과 비협조로 인해 영흥사는 정상 궤도에 오를 수 없었다.

[창성사의 설립]

새로운 상회사인 신상 회사를 창설하여 내장원에 부속시키고자 하였다. 1903년(광무 7) 10월 인천항 신상 회사(紳商會社)를 본보기로 한 창성사(昌盛社)를 설립하였다. 이를 통해 내장원에서는 영흥사의 실패를 만회하고 객주의 활동을 보호·육성하여 안정적인 재원을 확보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다.

창성사의 내부 구성은 최고 책임자로 총장 직책을 두고 현직 관리인 의정부 찬정(贊政)이 겸직하도록 하였다. 이 외에 도사장(都社長), 부사장, 도총무(都總務) 등이 있었는데, 이 자리도 현직 관리가 역임하였다. 이러한 인적 구성은 객주 또는 하급 관리로 임명했던 이전 상회사의 인적 구성과는 다른 모습이다. 창성사에서는 고위 정부 관리들을 임명하여 외국 상인으로부터 객주의 보호와 재정확보에 더욱 노력을 기울이고자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군산 지역 객주 총 80명~90명 가운데 51명이 창성사 창립에 참여하였다. 이후 그 인원은 70명~80명으로 증가하였다. 상납액은 영흥사에서 납부하던 금액보다 인하되었고, 품목에 따라 수세하던 수세 규칙도 폐지되었다. 내장원의 이러한 노력은 상업의 폐단을 줄이고 일본 상인들의 경제 침탈에 제한을 가하면서 객주의 이익을 보호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러일 전쟁 이후 군산 지역 상업계의 변동]

객주 보호를 통한 상업 장려와 국가 발전을 도모했던 대한 제국의 위와 같은 의지는 러일 전쟁 이후 변화를 맞게 되었다.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이후 을사 늑약을 체결하고 대한 제국의 재정을 장악하기 위한 여러 계획을 실현하였다. 객주와 관련해서는 일본 상인의 상업 행위와 정부에 재정적 뒷받침을 하고 있는 객주 체제를 와해시키고자 하였다.

먼저 감리서의 폐지를 통해 상회사에 대한 정부의 지원을 차단하였다. 군산에서는 옥구 감리서의 관리를 받고 있었던 창성사가 옥구 감리서가 폐지됨에 따라 더 이상 황실과 정부의 지원을 받을 수 없게 되었다. 다음으로 일본인 재정 고문 메가다에 의해 외획(外劃) 제도가 폐지되었다. 외획 폐지로 인해 객주들은 자금력에서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외획 폐지 이전 군산 지역 객주들은 배정된 외획금을 바탕으로 미곡 무역을 실시하여 상업 자본을 축적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외획 폐지와 정부의 지원 차단으로 인해 객주들은 일본 상인에게 밀리고 자본 축적의 기회를 상실하게 되었다.

1906년(광무 10) 군산 이사청(群山理事廳)이 설립된 이후에는 일본인 잡화상, 짐꾼, 목수 등 일본 인구가 증가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군산이 미곡 유출지의 거점으로 성장하면서 일본인 농장 경영자들이 몰려들기 시작하였다. 이전에 설립된 구마모토[熊本]·미야자키[宮崎]·오쿠라농장[大倉農場] 이 외에 많은 농장이 설립되었고, 군산 농사 조합(群山農事組合)과 일본인 상공 회의소가 설립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곳에는 군산을 대표하던 일본인 미곡상들이 자리를 잡기 시작하였다.

일본인은 설립된 각종 기관을 통해 미곡의 생산과 유통을 장악하였고, 군산-오사카 노선을 통해 미곡을 대량으로 반출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이전 군산의 객주를 통해 인천, 목포 등지로 수출되었던 것이 이제는 일본인들이 직접 일본으로 수탈하는 구조로 변하게 된 것이다. 이는 미곡을 중심으로 취급하던 군산 지역 객주들의 기반이 약해지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또한 정부의 지원을 받던 창성사가 1906년(광무 10) 3월~12월 사이 군산 신상 회사(群山紳商會社)와 군산 객주 상회사(群山客主商會社)로 분열되는 상황이 초래되었다.

[군산 지역 객주 상회사의 사회·경제 운동]

러일 전쟁 이후 가속화되는 일제의 경제 침탈과 그에 따른 일본 상인의 상권 확대와 개항장에서의 주도권 장악은 객주 상회사의 위치를 더욱 약하게 하였다. 이에 군산 지역 상회사들은 경제와 교육부분에서 이를 극복해 나가고자 하는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이를 통해 상회사를 재건하여 상권 회복과 경제 주권을 찾고자 하였다.

1907년(융희 1) 1월 부산에서 시작된 국채 보상 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어 가는 가운데 군산에서는 객주들이 주도하여 국채 보상 운동을 전개하였다. 전라북도의 다른 지역은 지방의 전직·혁직 관리들의 주도하에 마을 단위로 군민들이 적극 참여하였는데, 군산에서는 객주들이 중심이 되어 국채 보상 운동을 전개하였다.

활동 내용을 살펴보면 군산 객주 상회사가 국채 보상 의무사(國債報償義務社)를 조직하여 보상 의연금을 모집한 결과 167원 78전의 보상 의연금을 모집되었다. 군산 신상 회사에서는 『대한 매일 신보사』에 국채 보상 의연금을 두 차례에 걸쳐 기탁 하였다. 군산의 객주들은 경제적 이해 관계와 외부 환경의 변화로 상회사가 분열되었지만 국채 보상 운동에는 모두 참여하여 경제 주권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또한 군산 객주 상회 객주 박상호(朴尙浩), 송병주(宋秉周), 군산 신상 회사 객주 김석현(金錫玄), 김홍두(金洪斗), 강자옥(姜子玉) 등은 대한 협회에 가입하여 계몽 운동에도 참여하였다.

군산 지역 객주 상회사는 교육 활동에도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 주었다. 객주 상회사가 중심이 되어 진명 의숙(進明義塾)과 금호 학교(錦湖學校)을 설립하였다. 학교의 운영에 소요되는 비용은 객주들의 구문에서 충당되었고, 학교에서는 관공립 학교의 교과목을 수학할 수 있었다. 이외에 군산 보통 공립 학교에 운영비를 보조해 주었으며, 어상 회사(魚商會社)에서는 노동 야학을 설립하여 운영하였다.

[일제 강점 전후 군산 지역 객주 상회사의 모습]

1908년(융희 2) 10월 군산 객주 상회사와 군산항 신상 회사는 관청의 단합 지휘로 군산 신상사(群山紳商社)로 개칭되었다. 군산 신상사에 참여하지 않은 객주들은 권업사(勸業社)를 만들어 구전을 분식하였다. 1908년(융희 2) 12월에는 일부 객주가 중심이 되어 객주조합소(客主組合所)가 설치되었다.

한편 1909년(융희 3) 10월 호상관 상회(湖商館商會)가 군산과 전주의 실업가들의 자금을 바탕으로 설립되었다. 설립 목적은 군산 지역 객주 영업자의 합동 도모, 상업계의 의견 청취 및 상업 발전, 호남 지역 교육 확장을 위해 설립되었다. 객상(客商)에게 숙식 제공, 상품 중개·매매, 수수료 수취, 외국 물자 직 수입 후 방매, 각 포의 객주와 상려 연락, 자금 대출을 하였다. 이는 호상관 상회가 기존 객주들이 했던 중개상의 역할 외에 무역 상인과 금융 기관의 역할을 추가하여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고자 했다. 호상관 상회에서는 상업 강습소(商業講習所)를 설립하였고, 야학교를 설립하여 교육 활동에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군산 지역 객주 상회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군산을 비롯한 전국의 객주 상회사들은 일제 강점을 전후하여 활동 영역이 축소되었다. 특히 「조선 회사령(朝鮮會社令)」과 「객주 취체 규칙(客主取締規則)」 등을 통해 상회사 설립이 제한되었고, 한국인 객주를 일본인 상인들이 운영하는 기구에 편제하여 자율적인 활동을 제약하여 객주의 도태를 추진하였다. 이로 인해 객주 상회사는 발전을 할 수 있는 동력을 차단당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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