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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700481
한자 三一運動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전라북도 군산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태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19년 3월 4일 - 영명 학교 학생들이 3·1 만세 시위를 계획하였던 교사들의 방면을 청구하는 시위 전개
발단 시기/일시 1919년 3월 5일 - 영명 학교 학생, 예수 병원 사무원, 개신교 신자, 천도교 신자, 여학생들이 군산 경찰서 앞에서 만세 시위
발단 시기/일시 1919년 3월 6일 - 천도교 신자들이 옥구군 대야면에서 만세 시위
발단 시기/일시 1919년 3월 29일 - 임피 장시에서 만세 시위
발단 시기/일시 1919년 3월 30일 - 제1차 만세 운동 관련자들의 공판을 앞두고 시민들 수백 명이 야간 시위
발단 시기/일시 1919년 3월 31일 - 제1차 만세 운동 관련자들의 공판장에서 만세 시위
발단 시기/일시 1919년 4월 5일 - 재판에 대한 불만으로 시민 천 여 명이 만세 시위
성격 만세 시위 운동
관련 인물/단체 이두열|김수영|고석주|송정헌|박연세|김병수|김성은|유희순|강문호|김수남

[정의]

1919년 3월 1일부터 약 2개월 동안 전라북도 군산시를 포함한 조선 전역에서 일어난 만세 시위 운동.

[개설]

3·1운동 당시 군산에서는 영명 학교 학생들의 교사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에 이어서 시내 각지에서 독립 만세 시위 운동이 발생하였다. 특히 1919년 3월 30일 제1차 만세 운동 관련자들의 공판을 앞두고 군산과 옥구 군중의 야간 시위는 상당수의 사망자가 발생하는 등 큰 파장을 일으킨 사건이었다.

[역사적 배경]

제1차 세계 대전 직후 미국 대통령 윌슨이 “각 민족의 운명은 그 민족이 스스로 결정하게 하자.”라는 이른바 ‘민족 자결 주의 원칙’을 표방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조선의 독립 운동가들 사이에 외교 독립 운동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특히 무단 통치에 대한 저항감, 또는 고종 독살설로 말미암은 분노감 때문에 많은 민중들이 만세 시위 운동에 참여하였다. 군산 지역은 조선 말 동학 농민 운동 진원지라 할 고부·고창에 근접한 지역으로서, 일제 강점기에도 일본인 대지주의 수탈이 심했기 때문에 시위가 격렬할 수밖에 없었다.

[경과]

3·1운동 당시 군산 지역에서만 7건의 만세 시위 사건이 발생했다. 7건의 사건을 박은식의 『한국 독립 운동 지혈사』와 관련 판결문에 의거하여 시기 순으로 열거하면 아래와 같다.

우선 영명 학교 교사들은 서울에서 내려온 김병수에게 서울 만세 시위 소식을 듣고 군산에서도 만세 시위를 계획하였으며 독립 선언서를 영명 학교 등사판을 이용하여 7천 매를 등사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계획은 사전에 발각되어 이두열을 비롯한 교사들이 강제 연행되었다. 이에 영명 학교 학생들이 1919년 3월 4일 군산 경찰서 앞에서 강제로 연행된 교사들의 방면을 청구하는 시위를 전개하였다. 여기에 참가한 영명 학교 학생 중 절반이 유치장에 구인되었다. 1919년 3월 5일에는 체포를 면한 영명 학교 학생들과 예수 병원 사무원, 개신교 신자, 천도교 신자, 여학생, 시민들이 가담하여 옥구군 개정면 구암리를 지나 군산 경찰서 앞까지 만세 시위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1919년 3월 12일까지 90여 명이 검거되었다. 그 중 어린 아이 10여 명은 풀어주고, 나머지는 검사국 및 군산 경찰서에서 취조를 받고 있었다. 그럼에도 1919년 3월 12일 군산 경찰서 창고에서 방화가 발생하였다.

이어서 1919년 3월 14일 군산 보통학교 학생 김학술, 라명, 신형식 등의 주도 아래 학생 70명이 항일 의지를 표현하기 위해 연서하여 퇴학원을 제출하였다. 이에 학교는 학부형을 소환하여 회유하고 설득하자 많은 학생들이 취학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이남율, 김수남군산 공립 보통 학교를 친일적인 학교로서 독립 운동에 저해된다고 판단하고 1919년 3월 22일 밤 8시 경 군산부 명치정 노상에서 군산 공립 보통 학교에 방화를 시도하였다. 또 1919년 3월 23일 밤 10시 전주통 신림 약국 앞에서 군산 공립 보통 학교 교사(校舍)를 방화하였다. 그리고 3월 28일에는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는 대화정[현 영화동]에서 잇단 정체불명의 방화 사건이 일어났다.

1919년 3월 30일 밤 9시경 다음날 개정될 제1차 만세 운동 관련자들의 공판을 앞두고 군산 시민들 수백 명이 횃불과 태극기를 들고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 때 일본 경찰과 군인은 총칼로 진압하였으며 심지어 발포하였다. 일본인 재향 군인과 남자들도 목총과 칼로 무장하고 그들의 집 앞에 가까이 오는 한국인을 무조건 구타하고 체포하였다. 그럼에도 군산 시민들은 3월 31일 제1차 만세 운동 관련자들의 공판장에서 만세 시위를 벌였다.

1919년 4월 5일에는 3월 30일의 무자비한 탄압과 3월 31일 재판에 대한 불만이 폭발하여 교사, 학생, 신자, 학부모, 시민 천 여 명이 대거 참여하여 만세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일제는 유화 정책으로 바꾸어 만세 시위를 방관하면서 관공서 경계만 엄중히 하였다. 그 결과 만세 시위가 전면적으로 확산되지 않았다. 이후 군산 지역도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시위가 이어지지 않았다.

한편, 1919년 3월 6일 노춘만의 주도 아래 천도교 신자들이 옥구군 대야면에서 만세 시위를 벌였고, 3월 29일 임피 장시에서 만세 시위가 전개되었다.

[결과]

군산 지역에서는 1919년 3월 4일부터 3월 12일까지 90여 명이 검거되었다. 그 중 청소년 10여 명은 풀려나고, 나머지는 검사국 및 군산 경찰서에서 취조를 받았다. 이후 군산 지역에서 만세 시위의 규모가 가장 컸던 시위는 1919년 3월 30일 만세 시위였다. 여기서 한국인 청년 21명이 피살되고 37명이 부상당하였다. 그러나 일제가 유화 정책으로 바꾸면서 시위 군중과 일본 경찰의 충돌은 줄어들었다. 또한 만세 시위와 방화로 징역 6개월 이상을 선고받은 자는 40여 명이었다.

[의의와 평가]

일제 강점 이후 무단 통치에 시달려온 조선의 민중들은 1919년 3월 1일 거족적인 만세 시위 운동을 전개하였다. 3월 1일부터 2개월에 걸쳐 전개된 만세 시위운동은 질적인 면에서건 양적인 면에서건 우리나라 민족 운동사에 남을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비록 독립은 달성되지 않았으나 3·1운동의 정신은 상해 임시 정부의 광복 운동과 만주 독립군의 항일 무장 투쟁으로 계승되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인의 민족 의식을 고양시키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군산 지역의 3·1운동은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는 등 일제의 헌병 경찰에 의해 무참히 진압되었다. 그러나 군산 지역이 전라북도 지역 중에서 만세 시위가 제일 먼저 계획되고 실제로 벌어짐으로써 다른 지역에도 영향을 미쳤다. 또한 이때의 운동 경험은 이후 군산 지역에서 벌어졌던 지역 사회 운동의 인적 물적 토대를 제공하였다.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군산 지역에서도 1920년대 일제의 문화 정치 공간에서 청년 운동, 농민 운동 등 다양한 대중 운동이 전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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