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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회 군산지회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700526
한자 新幹會群山支會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전라북도 군산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정원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설립 시기/일시 1927년 6월 12일연표보기 - 신간회 군산지회 설립
해체 시기/일시 1931년 5월 16일연표보기 - 신간회 군산지회 해산
성격 항일 운동
설립자 민족 주의와 사회 주의 독립 운동 세력

[정의]

1927년 2월 15일 민족주의계와 사회주의가 연합하여 조직한 신간회의 군산 지회.

[개설]

1920년~1930년 민족 독립운동 흐름은 민족주의 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으로 양분되어 있었다. 두 흐름은 민족 운동의 이념·방법론·주도 세력 등에 따라 여러 갈래로 나누어져 있었고, 이런 상황을 극복하고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자들의 협동 전선을 추구하며 1927년 2월 신간회가 창립되었다.

신간회는 창립 이후 민족·자주·독립 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국내외에 지회를 설립하기 시작하였다. 전국의 청년·사상·노동 농민 단체 등에서는 민족 단일 전선 형성을 통한 민족 독립 투쟁을 요구하며 신간회 지회 설립을 지지하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지지 형태는 기존에 존립하던 사상 단체의 해체와 전선의 통일을 통해 신간회를 지지하였다. 그 결과 1927년 말까지 전국적으로 104개의 지회가 설립되게 되었다.

군산에서는 군산 청년 혁신회가 신간회에 대한 지지와 후원을 표명하였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1927년 6월 12일 신간회 군산지회가 설립되게 되었다. 신간회 군산지회는 노동 운동에서 활약한 인물들이 중심이 되어 설립되었고, 노동·농민 운동을 통해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설립 목적]

신간회 군산지회는 신간회 강령 및 정책에 따라 군산 지역 민족 주의 운동자와 사회 주의 운동자의 연합을 통한 민족 독립 운동을 실천해 나갈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변천]

신간회 군산지회 설립을 위해 먼저 군산 지역 신간회 설립 준비 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설립 준비 위원회는 군산 지역에 존재하고 있던 청년 단체가 중심이 되어 그 지지와 후원 아래 구성되었다. 설립 준비 위원회가 구성된 이후에는 회원 30명 이상을 모집하여 본부에 군산지회 설립 신청 후 승인을 받고 1927년 6월 12일 설립되게 되었다.

설립 당시 군산지회의 조직은 회장, 부회장, 총무, 간사, 회원 체제로 구성되었다. 회장 김현창(金顕彰), 부회장 이필수(李弼秀), 간사 김세민(金世民), 방한회(方漢廻) 등으로 간부진을 구성하였다. 이후 정기 대회를 통해 조용관(趙容寛), 김홍두(金洪斗)와 같은 사회 주의자와 민족 주의자들이 간부진에 참여하게 되었다. 회원 가입은 이력서를 자필로 쓸 수 있을 정도의 지식을 갖추고 있어야 가능하였다.

신간회 군산지회의 운영은 사회 주의자들이 지회의 운영을 장악하고 있었으며 민족 주의 진영에서 결합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민족 주의 세력으로 참여한 인물로는 홍종익(洪鍾翊), 김홍두, 이형근(李亨根), 김백룡(金白竜) 등이 있었다. 또한 신문사의 지방 기자나 신문 보급소를 경영한 언론계 지식인의 참여도 있었다. 지회 활동에 소요되는 경비는 회원들이 내는 회비에 의해 충당하였고, 그것이 모자라는 경우에는 발기인이나 지방 유지들에게 의연금을 모집하였다.

신간회 군산지회 내부에서 민족 주의자들과 사회 주의자들이 큰 갈등을 일으킬 만한 노선상의 갈등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사회 주의자들의 갈등이 심화되어 내부 역량이 약화되어갔다. 또한 1930년에 들어서면서 홍명희(洪命憙), 한용운(韓龍雲) 등 핵심 간부의 구속, 신간회 내부의 좌우익의 대결, 1930년 9월 18일 코민테른[Communist International]의 9월 테제 등이 문제가 되어 해소 분위기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이후 1931년 5월 15·16일 신간회 해소 문제를 다루기 위한 전체 대회가 열린 후 신간회 군산지회는 해소된 것으로 보인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신간회 군산지회는 군산 지역의 노동자·농민 문제에 관심을 갖고 활동을 전개하였다. 군산에서 노동 문제는 민족적 차별에 의한 모순에 있었지만, 일제의 자본은 그것을 민족 내부의 계급 모순으로 전환시켰다. 이에 신간회 군산지회에서는 순회 강연회, 노동 야학, 교양 강좌 등을 통해 군산 지역 노동 운동을 민족 독립 운동으로 발전시켜 나가고자 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강연회를 개최하여 신간회를 선전하고 민족적 결집을 이루려는 모습을 보여 주었고, 야학을 운영하며 노동자 계몽과 문맹 타파를 전개하였다. 1928년 2월 7일에는 동양 척식 주식 회사 및 기타 일본인 회사 지주 소속의 일본인들의 군산 이민을 반대하였다.

이 외에 일본인 선주 및 어부들과 조선인 어부들 사이에 충돌과 분쟁에서 불리한 입장에 있던 조선인 어부들의 권익을 옹호하였다. 신간회 조직 형태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여 1929년 2월과 8월에는 전북 지역 신간회 지회 연합 기관의 설치를 중앙에 요구하였다. 기관지 발행을 통해 군산지회의 의견을 결집할 수 있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의의와 평가]

신간회 군산지회는 군산 지역 청년 운동에 의해 고무되고 조직적인 지원을 받았다. 설립 당시 집행 위원 13명 가운데 7명이 군산 청년회 간부로 활동하였고, 군산 청년 동맹의 경우에서도 위와 같은 상황이 확인되었다.

군산지회 간부진을 이끌었던 인물들은 지역 언론인, 사회주의 지식인 등이 중심이 되었는데, 이는 신간회 군산지회가 지식인 주도의 민중 운동의 성격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또한 간부진을 구성했던 인물들은 군산 이외에 충청남도, 평안도 지역에서 이주한 인물도 있었는데, 이것은 군산이 상업 도시로 다른 지역보다 고용 기회가 많았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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