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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신앙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701951
한자 民間信仰
분야 생활·민속/민속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전라북도 군산시
집필자 조종안

[정의]

전라북도 군산 지역의 민간에서 오래 전부터 내려온 여러 가지 신앙.

[개설]

제정일치(祭政一致) 사회였던 성읍 국가 시대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에서 연구된 민간신앙(民間信仰)은 신화(神話)를 비롯해 의례(儀禮)·주술(呪術)·제사(祭祀)·행사(行祀)·마을 신앙·가정 신앙·세시 풍속(歲時風俗)·통과 의례·장제(葬祭)·점복(占卜)·금기(禁忌)·풍수(風水)·무속(巫俗)·조상 숭배·동제(洞祭) 등과 비집단적 신앙, 신흥 종교, 민간 의료 등으로 구분된다.

세분하면 종교적 신념[신화]과 실행[의례·주술], 집단적인 것과 비집단적인 것, 사회적 차원에 의한 것[가정 신앙·마을 신앙·동족 신앙], 시간에 의해 반복되지만, 일회적인 것[세시 풍속·통과 의례], 전문적인 것과 비전문적인 것[무속·조상 숭배], 혈연과 지연의 것[제사·동제], 행위의 단순성과 복잡성에 의한 것[금기·주술·풍수·제사·굿], 조직성과 비조직성의 것[주술·신흥 종교] 등이다.

이들 중 유교와 신흥 종교는 민간신앙 범주에서 제외할 수 있으며, 유교 이전의 조상 숭배는 반드시 포함된다. 무속 신앙은 넓은 의미에서 전문적인 민간신앙이라 볼 수 있다. 특히, 무속 신앙 중에도 강신무(降神巫)·세습무(世襲巫)·학습무(學習巫) 등은 학술적인 구분도 가능하다. 그리고 판수와 무당은 서로 상극되는 상반된 유형으로, 판수는 학습무로 분류되고 무당은 강신무 또는 세습무로 분류된다.

[군산 지역에서 전승되어 온 민간신앙]

북쪽은 금강, 남쪽은 만경강, 서쪽은 서해와 접하는 반도형 도시 군산[옥구·임피 포함]에는 민간신앙이 백성들의 일반적 신앙 형태로 진즉부터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집안에서는 어머니들이 새벽마다 부뚜막에 정화수를 떠놓고 두 손을 모아 소원을 비는 형태[가택 신앙]로 존재하였고, 마을에는 마을의 토지신이나 수호신을 모시는 당산(堂山), 당집 등이 있었다.

당산제 또는 당제는 마을 사람들이 해마다 음력 정초에 마을의 안녕과 풍년·풍어를 기원하며 지내는 공동 제의(祭儀)를 말한다. 산이 많았던 군산 지역에서는 마을 입구나 뒷산의 아름드리 고목을 당산 나무라 하여 신성시하였고, 마을과 마을을 이어주는 고갯마루의 서낭당[성황당]이나 주변의 장승, 솟대, 거대한 바위 등을 신체(神體)로 삼아 모시기도 하였다.

군산 지역의 가택 신앙[가신 신앙]은 집안에서 가장 높은 성주신[성조신·상량신]을 비롯해 조상신(祖上神), 삼신(三神), 조왕신(竈王神), 터주신[지신] 등을 지극 정성으로 모셨다.

그 외에 잠밥 메기기, 떼쳐 물림, 동토막이, 삼자 뱅이[이사나 신행 때], 하루살이 뱅이[초학], 사위심, 며느리심 등이 내려왔으나 산업 사회로 접어드는 1970년대 이후 대부분 사라졌다.

군산 지역에서는 어청도 치동묘제를 비롯해 20여 곳의 당제가 조사된 것으로 미루어 내륙과 섬마을 모두 각자의 당산을 모시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군산시 나포면 공주산 당산은 지금도 확인할 수 있으며, 월명 공원 수시탑 근처에 있던 당산은 『전라우도 군산 진지도(全羅右道群山陣地圖)』에서만 존재가 확인되고, 중동 당산제는 요즘에도 해마다 정월 대보름에 열리고 있다.

한편 군산시 회현면 죽동과 개야도 당산제가 조사됐으며, 신흥동 주민이 뒷산[차독산] 흰 바위를 신체(神體)로 삼아 매년 정월에 당제를 지내왔으나 최근에 맥이 끊기었다. 군산시 창성동 일대에는 ‘노서산 당산’이 있었고, 은적사 근처[현 체육공원]에 무속인 기도처가 있었으며, 그밖에 원도심권을 비롯해 옥구·임피 지역에 수많은 서낭당과 마을을 지키는 당산이 존재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군산 지역의 주요 당산제와 굿]

1. 중동 당산제(仲洞堂山祭)

군산시 중동에서 해마다 정월 대보름날 열리는 당제이다. 군산시 중동 노인 회관 2층에 마련된 당집에서는 해마다 음력 정월 대보름날 오전에 당제를 지낸다. 중동 당산은 재래시장이었던 ‘서래장’을 지켜 준다고 믿는 ‘서래산[돌산]’ 동쪽 중턱에 당집이 있었으나 계속되는 돌산 채석 작업으로 헐릴 위기에 처하자 1976년 주민들이 나서서 ‘당우(堂宇)’를 중동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중동 당제는 2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군산의 유일한 동제(洞祭)로, 제(祭)의 목적은 주민의 안녕과 복(福)을 축원하고, 풍년과 풍어를 기원하였음을 제문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산업화 과정을 거치면서 농토는 대부분 주택 단지가 되었으나 어업은 지금도 이곳 주민들의 경제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당제는 분향·강신·헌작·독축 순으로 진행된다. 옛날에는 책 한 권 분량의 축문을 다 읽었으나 지금은 앞부분만 읽는다. 제관이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며 소지를 올리고 제를 지내는 동안은 풍장[풍물]치는 사람들은 대기하고 있다가 제가 끝나면 주민들이 올라와 음복하고 풍물 가락에 맞춰 흥겹게 어울린다.

서래산에 있던 당집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기와집이었고, 그 옆에 당지기 할머니가 살면서 당을 지켰다고 한다. 당제의 대상은 산신과, 당할아버지, 당할머니, 이공(李公), 오공(吳公), 조공(趙公) 등으로 정월 열나흘에 지냈으나, 요즘은 대보름날 지낸다. 현재 당에 모신 신령들 화상(畵像)은 현 위치로 옮기면서 새로 그려서 모셨고, 서래산의 당집 화상은 보존되고 있지 않다.

제관은 2명이며, 정월 대보름 며칠 전부터 동네 아주머니들이 목욕재계하고 술과 음식을 정성껏 준비했다고 한다. 제사가 끝나면 주민들은 풍물패를 앞세우고 거리제를 지냈으며, 만조가 되는 시간에 맞춰 금강의 지류인 경포천 변[깨꼬랑]에 돼지 머리와 음식을 차려놓고 풍어제[용왕제]를 지냈는데, 요즘도 비슷한 절차로 행해지고 있다.

2. 중앙로 동제(中央路洞祭)

군산시 중앙로에서 해마다 열렸던 부락제[마을굿]로, 지금은 맥이 끊겼지만 1937년 조사하여 보고된 바가 있다. 중앙로 동제는 매년 음력 정월 열나흘에 지냈다 한다. 제(祭)의 대상은 군산시의 남쪽 노서 산록(老鼠山麓)의 신당에 모신 ‘빙주 대신 부처’(憑主大神夫妻)와 삼신[李公, 吳公, 趙公] 및 신당을 수호하는 노서 산신, 동구 축신이었다.

1701년(숙종 27) 때 만들어진 『전라우도 군산진 지도(全羅右道群山鎭地圖)』를 보면 노인 성(城)이 있고, 성 안에 당산의 표시가 있는 것으로 미루어 동제를 지내온 것은 200년 이상 지속되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겠다. 제관은 축관·초헌관·아헌관·종헌관 등 4명이며, 제관 선정은 유지들이 상의하여 주민 중에 건강하고 부정이 없는 사람을 뽑아 정했다.

제전(祭奠)은 정월 열나흘 저녁 7경부터 시작되는데, 산신제, 동신제[당제] 순으로 지냈다. 당제를 지낼 때는 ‘빙주 대신 부처’라는 위패를 신당 중앙에 봉안하고, 삼신의 신위를 옆에 나란히 모셨다. 제는 대보름날 새벽 1시경 끝나는데, 동민들이 제물을 음복하고 나머지는 각 가정에 분배했다. 그러나 동구 축신 제물은 5개의 짚 인형을 만들어 안에 넣고 노상에 태웠다. 짚 인형 5개는 오방 신장을 상징하며 동서남북과 중앙에 잠재한 악귀를 쫓아내는 뜻이었다 한다.

1937년 집계에 따르면 동제 경비는 1회에 80원 가량 들었으며 비용을 마련하는 방법은 정월 초하룻날부터 4~5일간 주민들로 구성된 풍물패가 동네 각 가정을 돌며 마련했다 한다. 이 풍물굿은 당제를 시작할 때부터 신당 근처에서 굿을 치며 또 제가 끝나면 주민 모두가 신당 앞에서 음복할 때 더욱 흥을 돋우어 절정을 이뤘다 한다.

3. 군산 용왕굿[수륙제]

군산 지역 세습무들이 산신과 용왕을 함께 모셔 주민의 안녕과 풍어를 기원하는 민속굿이다. 예로부터 군산 지역은 동부[지금의 죽성동, 경암동, 경장동, 둔율동 지역]와 서부[지금의 영화동, 중앙로 1가, 신흥동 지역]로 나뉠 정도로 무속이 매우 성행했을 뿐만 아니라, 세습무[단골, 당골]가 많았다.

군산의 동부와 서부 지역 당산에서는 각 마을에서 당산제를 지냈으며, 1년에 한 번은 두 지역이 함께 ‘수륙제’로도 불리는 대규모 ‘용왕굿’ 제사를 지냈다.

삼면이 해안과 접하고, 하천과 방죽, 저수지가 많았던 군산 지역은 어린이 익사 사고가 자주 일어났다. 따라서 1970년대까지만 해도 해마다 여름이면 방죽이나 하천 주변에서 ‘넋 건짐 굿[씻김굿]’이 자주 행해졌다. 그런 영향을 받아 용왕굿도 다른 지역과 달리 익사하는 일이 없도록 기원하는 내륙 주민들의 바람과 풍어를 기대하는 어민들의 소망이 섞여진 형태로 치러진다.

군산 용왕굿은 ① 산신과 용왕을 모시는 ‘용왕 강신[내림] 굿’ ② 인간의 부정을 용서해달라고 비는 ‘부정굿’ ③ 임자 없이 죽은 혼백을 불러 해원 시키는 ‘육갑 해원풀이 굿’ ④ 배선왕을 모셔 안전을 비는 ‘선왕풀이 굿’ ⑤ 객사와 사고 등 원통하게 죽은 혼신들을 해원시키는 ‘중천 해원 굿’ ⑥ 뱃사람들의 안녕과 무사고를 비는 ‘기원[축원]굿’ ⑦ 용궁의 용왕 사자들에게 그동안 모신 혼백들을 잘 모시고 가달라고 기원하는 ‘용왕 사자 풀이 굿’ 순으로 진행된다.

‘용왕 사자 풀이 굿’이 끝나갈 즈음이면 집집이 마련해온 허수아비[제웅]를 짚으로 일곱 마디를 묶고 먹으로 식구들 이름과 나이를 적은 뒤 ‘대명 대신(代命代身) 받아 갖고 가라’는 주문을 외우면서 바다 쪽으로 밀어낸다. 이는 사람은 죽지 말고, 사고도 나지 말고, 사람 대신 허수아비로 대신해 달라는 뜻이라 한다.

4. 월명산과 오성산에서 지냈던 기우제(祈雨祭)

농경 사회가 수천 년 이어졌던 땅에 전해지는 민간신앙의 하나로 기우제(祈雨祭)를 들 수 있다. 우리 선조들은 여름에 가뭄으로 농작물 피해가 심하면 하늘에 비를 내려주기를 기원하는 기우제를 지냈다. 군산은 지명에 나타나듯 100m~200m 구릉지로 이루어진 도시로 기우제를 지내는 산이 따로 있었는데, 월명산, 오성산, 임피의 남산, 오봉산 등이었다.

월명산 기우제는 가뭄이 심할 때 인근 마을 사람들이 나무 장작을 지고 정상에 올라가 장작에 불을 지피는 형태였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일본인들이 ‘자우 혜민(慈雨惠民)’이 음각된 비석을 월명산 정상에 세우고, 군산 부청이 주관, 군산 신사의 신관이 제사를 주도하면서 조선식 기우제[장작 태우기]는 중단되었다. 따라서 월명산 비석은 ‘기우제 비’로도 불리었다.

백제인의 우국충절 정신이 깃든 오성산에서도 최근까지 기우제를 지냈다. 오성산 기우제는 가뭄이 심해지면 주변 마을 사람들이 풍장을 앞세우고 새끼 돼지 한 마리와 장작더미를 짊어지고 오성인 묘가 있는 정상에 오르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주민들은 장작불을 지핀 후 제사를 지냈는데, 그때 새끼 돼지를 산 채로 멱을 따 그 피를 정상 부근에 뿌렸다고 한다.

기우제를 지내는 날 오성산 정상은 선혈이 낭자했을 것이다. 따라서 오성산 기우제는 날이 가물면 인간이 스스로 잘못을 하늘에 빌고 비를 내려주기를 바라는 일반적인 기우제와 달리 모두가 신령스럽게 생각하는 장소를 짐승의 피로 더럽히면 하늘이 노하여 벼락과 함께 비를 내려 더럽혀진 땅을 말끔히 닦아준다는 믿음 아래 행해진 기우제였다.

5. 고군산 군도의 민간신앙

민간신앙 흔적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곳은 역시 도서(島嶼) 지역이다. 어청도, 선유도, 무녀도, 장자도 등 63개의 유·무인도로 이루어진 고군산 군도에는 많은 전통 문화유산이 수백수천 년을 견뎌오며 사라지거나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방치되고 있다. 하지만 요즘도 고사(告祀) 지내는 모습이 간간이 눈에 띄며, 민간신앙의 중심인 당집도 여러 곳 남아 있다.

현재 개야도 당집과 제례 순서는 마을 젊은이들에 의해 전승되고 있어 문화재 지정을 통해 보존이 가능하며, 어청도 당집 치동묘(淄東廟)는 보수공사 중이다. 또, 선유도 오룡묘[군산시 향토 문화유산 제19호]는 관광 자원으로 보존하기 위해 마무리 보수공사가 한창이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목조기와 건물인 오룡묘는 다섯 마리 용이 산다고 해서 붙은 명칭이다.

선유도 망주봉 남쪽 기슭에 자리한 오룡묘는 두 채의 당집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곳 주민들은 윗당, ‘아랫당이라 불렀다.

1123년(인종 1)에 송나라 사신으로 ‘군산도[선유도]’에 온 서긍(徐兢)이 한 달가량 머물면서 집필한 『선화봉사 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에서 ‘오룡묘’가 등장하는 것을 볼 때, ‘오룡묘 당제’의 역사가 상당히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새만금 공사로 육지가 된 ‘야미도’에서도 재앙을 몰아내고 어민들의 안위와 풍어를 기원하는 산신제[영신당제]를 오래전부터 지내왔다고 한다. 20대에 어부였던 남편을 바다에 빼앗기고 60여 년을 혼자 살아온 민순애[81] 할머니는 “섬 주봉의 바위를 제당으로 사용하면서 뒷당산이라 불렀고, 팽나무, 밤나무가 울창한 숲을 앞당산이라 했는데 150여 년 전 건물인 영신당은 언제 사라졌는지 모르겠다”며 안타까워했다.

바다가 삶의 터전이었던 섬사람들은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가를 알고 있기에 초자연적인 절대자에게 의존하고자 하였는데, 대상이 바로 당산(堂山)에 모신 토속신들이었다. 마을 수호신을 모시는 당산은 종교적 기능 외에도 주민들이 모여 일을 논의하고 제사가 끝나면 굿판을 벌여 결속력을 다지는 마을 공동체의 정신적 구심점 역할도 하였다.

6. 앉은 굿[독경]

군산 지역 민가(民家)의 안방이나 마루, 부엌 등에서 법사[경쟁이·무당]가 앉아서 하는 굿이다.

독경(讀經)은 불교 경전을 소리 내어 읽는 불교 의식을 말하며, 민간에서는 무속과 접목되면서 굿의 형태로 내려오고 있다. 특히 군산 지역은 무속인 경력 46년의 최갑선[전라북도 무형 문화재 제26호]법사가 정기적으로 공연하고 있으며, 요즘도 음력 정월이 되면 섬이나 육지의 민가에서 독경하는 모습이 간간이 목격되고 있다.

가정에서 음력 정월에 길일을 잡아 하는 독경은 부엌, 장독, 안방, 대문 순으로 경을 읽는데, 방법은 집집이 조금씩 다르다. 집주인의 요청으로 화장실, 대청, 곳간, 마구간, 축사 등에서도 경을 읽기 때문이다. 군산은 어항(漁港)이어서 주로 고깃배 선주들이 독경을 많이 했으며 예전에는 백화 양조, 신흥 목재, 한국 합판 등 지역 기업들도 많이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앉은 굿[독경] 의례를 이끌어나가는 사람을 법사라 하며, 선굿과 달리 흰색 한복 차림의 법사가 머리에 한지로 만든 고깔을 쓰고 방석에 앉아 장구와 꽹과리[북과 징을 차기도 함]를 두드리며 자신의 반주에 맞춰 경을 읽어나간다.

군산 지역에서는 ‘굿을 한다’란 용어보다 ‘경을 읽는다’는 말로 표현되며, 안택경(安宅經), 우환경(憂患經) 등과 같이 ‘경’으로 불린다. 독경하는 장소에는 신들에게 바치는 공양물(供養物), 즉 정성 들여 만든 음식이 차려진다. 상 위에는 각종 떡과 술, 과일, 부침개, 청수(淸水) 등을 올린다.

굿거리마다 다른 상을 차리는데, 모시는 신(神)에 따라 상의 이름도 달라진다. 예를 들어 ‘성주’에게 올리는 상은 ‘성주상’이라 하는 식이다. 저녁에 시작한 독경은 새벽녘에 끝나는데, 음식은 대부분 이웃과 나눠 먹는다.

7. ‘뱃고사(-告祀)’

군산 지역 선주와 어부들이 해신(海神)과 선신(船神)에게 풍어와 무탈을 축원하는 고사이다. 뱃굿, 행선고사, 도장굿, 선망굿, 배선왕굿 등으로도 불린다.

군산 지역 어민들은 조선소(造船所)에서 배를 건조할 때 길일을 택해 용골[배밑판]과 선수를 세워 첫 고사(告祀)를 지냈다. 진수식 때, 출어할 때도 돼지 머리를 올려놓고 뱃고사를 지냈다. 뱃고사에는 선주, 선원, 배 목수, 친지는 물론 주민[구경꾼]도 함께했다. 구경꾼이 많았던 것은 고사 음식을 여럿이 나눠 먹어야 재수가 좋고, 만선을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뱃고사는 옛날부터 군산 지역에 전해 내려온 의례로, 반드시 배 안에서 지냈다. 선실에 모신 서낭과 기관실·선수(船首)·선미(船尾) 등에 제물을 차리고 어부들의 안녕과 풍어를 빌었다. 선주가 소지를 올리며 풍어와 무사고를 빌기도 하고 무당을 청하기도 했다. 빌기를 마치면 음식을 조금씩 덜어 뱃전을 돌아다니며 잡귀를 풀어먹인 뒤, 모두 음복하고 나눠 먹었다.

선주들은 매월 초사흘에 집에서 고사를 지냈다. 섣달그믐, , 추석, 정월 대보름 등 명절에도 빼놓지 않았다. 특히 만선을 했을 때, 배가 자주 고장 날 때, 선주나 선장 몸이 아플 때도 길일을 잡아 고사를 지냈는데, 명태[북어]와 실타래를 꼭 챙겼다. 약간의 돈과 함께 선수(船首) 기둥에 매달아 놓고 고사를 지내기 때문이었다.

북어는 악귀를 쫓는 어로신(漁撈神) 역할을 했으며 고사가 끝나면 바다에 떠내려 보내거나 배를 수호하는 선왕신(船王神)으로 모셨다. 요즘에도 군산 째보 선창에 가면 ‘손님들 건강과 영업 번창을 위해서’ 객실에 북어와 실타래를 걸어놓은 식당을 볼 수 있다.

[군산 지역 어부들이 금기시 했던 일들]

1970년대만 해도 어선은 남자만 승선할 수 있었다. 여성은 부정 탄다고 해서 뱃일은 커녕 고사 지내는 날도 떡시루를 들고 배에 오르는 것조차 금했다. 해서 고사[용왕제]를 지내는 날 음식 심부름은 어부와 구경꾼으로 참여한 동네 아이들 몫이었다.

부자(父子)가 함께 출어하지 않기. 휘파람 불지 않기. 칼·신발 조심하기. 밥 먹을 때 생선을 뒤집어서 발라먹지 않기. 날씨 얘기하지 않기. 아무리 급해도 뛰지 않기, 선장 자리에 함부로 앉지 않기 등 선주와 어부들이 배에서 지켜야 할 금기 사항도 많았다.

부자가 함께 출어를 금지한 것은 사고가 나더라도 대를 이으려는 뜻이고, 배에서 휘파람을 불면 태풍이 온다고 믿었다. 신발을 바다에 빠뜨리면 사고가 날 징조로 여겼다. 칼을 바다에 떨어뜨리는 것도 용왕신 등에 칼을 꽂는 행위와 다름없다 해서 불경으로 여겼다.

어부들은 배에서 밥을 먹을 때도 생선을 뒤집어 발라먹지 않았다. 생선은 배 모양과 비슷한 유선형이어서 배가 뒤집어진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뱃사람들은 생선을 반찬으로 먹을 때 한 쪽을 다 먹으면 뒤집지 않고 가시를 발라낸 뒤 남은 한쪽을 마저 먹었다.

날씨 얘기도 금했다. 날씨 얘기는 육지의 농가도 마찬가지였다. 부모가 이것저것 가리는 집에서는 농가에서도 ‘날씨가 좋다’는 말을 못하게 했다. 날씨가 좋다고 얘기하면 날씨가 궂을까 봐, 즉 비를 몰고 오는 마파람이나 태풍을 암시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었다.

배에서 뛰지 못하게 막은 것은 뱃동서[다른 어부]들이 불안감을 느끼고, 기관실에 있는 사람은 배에 큰일이라도 난 줄 알고 놀라기 때문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이러한 금기 사항도 많이 줄어들었다. “요즘엔 여성들이 떡시루를 들고 배에 오르는 모습을 종종 본다”는 군산시 금암동 신진 조선소 대표 나동문의 전언에서 금기 풍속의 변화 과정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