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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과 호국ㆍ보훈의 애국심 낙동강 방어선은 6.25 전쟁 당시 북한군의 남진을 막아내기 위해 낙동강을 따라 설정한 방어선을 의미한다. 이 방어선은 동서 80km, 남북 160km로 서북쪽으로는 경북 왜관을 기점으로 하여 동해안의 포항에 이른다. 한편 서쪽은 낙동강 본류를 따라 진주 남강과의 합류지점인 창녕군 남지읍에 이르고, 다시 함안 진동리를 거쳐 진해만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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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 많고 다리 많은 대촌, 다리목마을 교항리(橋項里)는 본래 다리목마을인 교항 1리와 법화 마을인 교항 2리로 이루어져 있었다. 최근에는 이들 마을 사이에 뉴제림 타운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교항 3리가 새로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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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병들이 부자들로 변한 마가들 다리목 마을은 현재 제방 공사가 이루어져 마가들을 사이에 두고 낙동강과 상당히 떨어져 있지만, 오래 전에는 낙동강물이 마을 가까이로 굽이쳐 흘렀다. 마을의 여러 지명과 지형적 특성들은 이러한 사실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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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덕비까지 세워준 농민들의 숙원 해결사 김경순 면장 다리목 마을은 ‘강과 산과 들의 마을’이다. 이 중에서도 들과 강은 농민들의 생계와 직결되는 주요 생활 자원이자 생태 환경이다. 마을 앞을 흐르는 낙동강 물은 마가들을 적셔주는 다리목 마을의 젓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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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학 전통과 금계초등학교 유치 운동 농촌에서 교육시설은 보통 인구가 밀집한 면 소재지 이상의 행정 중심지역에 들어선다. 하지만 다리목 마을의 대구 금계초등학교는 행정 중심지가 아닌 일반 자연 마을에 설립되었다. 이는 300호가 넘는 대촌(大村)이라는 점 외에도 200여 년 전부터 고을의 서당 교육이 이 마을에서 지속적으로 실천되어온 역사적 전통 때문이 아닌가 싶다. 실제로 이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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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계초등학교를 졸업한 마을 인재들 금계초등학교의 교명은 맞은편에 있는 금계산(金鷄山)에서 따온 것으로 1966년 정식으로 개교하였으나, 1962년부터 4년 동안은 옥포 초등학교 금계 분교라는 이름으로 운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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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 제방공사와 부농의 꿈 ‘옥공 제방(玉工 堤防)’, ‘논공제(論工堤)’라고도 일컫는 낙동강 호애 제방(洛東江 湖涯 堤防)은 옥포읍 다리목 마을에서 논공면 금포리(金圃里)까지의 낙동강 제방이다. 1960년대 제방공사로 일대의 들판이 농토로서의 제 역할을 하기 전까지는 낙동강이 자주 범람하여 3년 걸러 1년만 배곯지 않고 먹을 수 있어도 퍽 다행으로 생각하였다. 따라서 이곳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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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 복지를 선도하는 김안순 노인회 회장 다리목 마을은 대촌(大村)답게 노인회 규모도 으뜸이이어서 회원만도 208명에 이른다. 마을 노인들의 복지를 선도하는 김안순 회장은 다리목 마을 노인회를 2년째 이끌고 있다. 노인들은 서로 존중하고 화합하며 삶의 지혜를 전승하는 일에도 솔선수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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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목마을 토박이 부녀회장 김숙이 1948년생인 김숙이는 3살 때 6.25 전쟁을 맞았다. 국군과 미군을 비롯한 연합군은 1950년 8월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온 인민군을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다리목마을은 낙동강 기슭에 위치하여 피아 공방전의 범위에 포함되었다. 마을 사람들의 기억에 의하면, 한때는 인민군이 도강하여 마을까지 들어왔다고 한다. 아군이 이를 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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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홍수와 선녀 이야기를 품은 금계산 금계산(金鷄山)은 다리목 마을 동쪽에 위치한 해발 487.3m의 뒷산으로 앞쪽의 낙동강과 더불어 배산 임수(背山 臨水)의 형국을 이룬다. 금계산은 마주하는 대방산(大方山)과 함께 비슬산으로 이어지며, 풍부한 삼림과 수자원을 지니고 있다. 금계산과 대방산 사이의 계곡은 ‘선녀곡’으로 일컬어지는데, 여기서 발원하는 교항천(橋項川)은 선녀마을, 법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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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들수리조합의 산증인 김선린 다리목 마을 마가들은 총 600정보에 이를 정도로 광활한 규모를 자랑한다. 이웃하는 신당과 강림, 논공 등의 마을과 공유하지만, 다리목 마을이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생계의 터전으로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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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풍수 전문가 김외상 풍수(風水)는 ‘풍수지리(風水地理)’라고도 일컫는데, 여기서 풍(風)은 기후와 풍토를 지칭하며, 수(水)는 물과 관계된 모든 것을 가리킨다. 즉 풍수는 음양론(陰陽論)과 오행설(五行說)을 기반으로 땅에 관한 이치, 즉 지리(地理)를 체계화한 전통적 사유체계이다. 풍수의 주된 목적은 일정한 경로를 따라 땅 속을 돌아다니는 생기(生氣)를 사람이 접함으로써 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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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의 문화 공간이자 대구시민의 쉼터, 이팝나무 숲 다리목 마을의 이팝나무 숲은 달성군 옥포읍 교항리 957, 958, 968번지에 조성되어 있는 귀중한 삼림 유전자원이자 향토자원이다. 예로부터 이팝나무 꽃이 만개하는 해에는 풍년이 든다고 하여 우리 선조들이 귀하게 여겨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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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설 전설과 마을 샘 다리목 마을의 입지적 특성은 다음 2가지로 정리된다. 하나는 주변보다 약간 높은 곳에 위치하며 마을 지형이 배의 형상을 닮았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금계산(金鷄山)과 대방산(大方山) 계곡에서 떠내려 온 흙과 낙동강물이 운반해온 토사가 충적된 토양 위에 형성되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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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각자의 리더십과 마을 근대화 달성군 옥포읍의 재적자 명부를 떼보면 다리목 마을 출신자가 절반 정도를 차지한다고 한다. 이유는 교육열이 높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외지로 나가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다리목 마을 사람들은 대구를 비롯하여 서울, 부산 등 대도시로도 많이 나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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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의 고향 찾아 되돌아온 김덕공 1932년생인 김덕공은 강원도 철원에서 태어났다. 일제 강점기 할아버지가 식솔을 데리고 강원도 철원군 어운면 홍원리로 이주했기 때문이다. 생명을 부지하기 힘든 시절, 할아버지는 오로지 먹고 살 길을 찾아 다리목 마을로부터 생면부지의 이곳에 정착했다. 당시는 자유롭게 이동이 가능했지만, 지금은 휴전선으로부터 60~70리나 이북으로 들어간 지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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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헌 처사 유적 보존회 김선태 회장 야헌(野軒) 김성노(金成魯) 선생은 사후 제자들이 유림계를 조직하여 매년 추모 향사를 지내올 정도로 다리목 마을의 큰 선비였다. 시대 변화에 밀려 비록 유림계는 와해되었을지라도, 6.25 전쟁 이전까지만 해도 그런 전통이 이어졌다. 하지만 이후 종손(宗孫)의 출향과 함께 선생의 관련 행적들이 유실됨에 따라 학덕이 빛을 잃어가는 듯했다. 아울러 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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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헌 김성노 선생의 학덕과 유림계 향사 유학자이자 선비로 이름난 김성노(金成魯, 1769-1831) 선생은 다리목 마을 입향조 김유원(金有元) 공의 10세손이다. 조선시대 영조 때의 사람으로 일찍 학문에 뜻을 두고 향시에도 세 번씩이나 합격하였다. 하지만 난세의 정치무대에 나아가기보다는 다리목 마을 금계산(金鷄山) 자락에다 ‘낙교재(洛橋齋)’라는 서당을 지어 후학 양성에 전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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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지 축조와 유정지계 유정지(柳亭池)는 다리목 마을의 간선 도로격인 5호선 지방도 아래에 위치한 저수지 명칭이다. 버드나무 ‘유(柳)’ 자의 유정지 명칭은 예전 못 가에 버드나무가 많이 서식한 데서 유래한다. 마을 사람들에게는 버드나무 ‘유’ 자와 못 ‘지’ 자를 한글로 소리 내어 일컫는 ‘버정못’ 명칭이 더 익숙하다. 유정지와 연해 있는 ‘버정등’ 동산 명칭도 이로부터 붙여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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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팝나무 숲 보존 노력과 애림 정신 다리목 마을의 이팝나무 숲은 마을의 역사와 맥을 같이 할 정도로 오래된다. 원로들은 마을이 조성되던 무렵부터 이팝나무 숲이 조성되었다고 말한다. ‘동네 방패’라고 일컫는 말처럼, 이팝나무 숲은 마을을 지켜주는 보호림으로서의 상징성을 지닌다. 이는 ‘이팝나무 숲 너머의 곳’을 의미하는 ‘간넘’ 지명에서도 확인된다. 여기서 ‘간(干)’은 방패를 뜻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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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사회 지역 사학의 요람, 낙교재 ‘낙교서당(洛橋書堂)’으로도 일컫는 낙교재(洛橋齋)는 야헌(野軒) 김성노(金成魯, 1769-1831) 선생이 19세기 초에 세운 일종의 사립학교였다. 낙교(洛橋)는 ‘낙동강 교항(다리목) 마을’이라는 의미로 선생이 태어나서 거주해온 다리목 마을의 서당임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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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외 농사로 대를 이은 조후제 작목 반장 다리목 마을 토박이 조후제(54세)는 마가들 제7농로에서 부인 박영숙(48세)과 함께 참외를 생산하는 ‘오병이어(五餠二魚) 농장’을 경영하고 있다. 농장 명칭은 기독교 신자인 이들 부부가 손수 지은 이름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떡 다섯 조각과 물고기 2마리로 5천명의 배고픈 이들을 구제했다는 성경 이야기로부터 유래한다. 최선을 다해 품질 좋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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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외 농사로 부농의 꿈을 이룬 김양순ㆍ안효선 부부 참외 시설 재배로 이름난 교항리 다리목 마을에는 예전부터 부부 중심으로 농사를 지어왔다. 농사철이 되면 이들은 새벽부터 밤까지 함께 다니면서 일하고 농사 기술도 공유한다. 특히 세심한 관찰과 자잘한 돌봄이 필요한 참외 농사에서는 여성들의 안목과 손질이 절대적이다. 보물 덩어리 교항 참외 ‘황후의 과실’을 생산하는 과정에서는 더 그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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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외 농사로 신지식 농업인상 1호 수상자가 된 김영호 김영호는 1948년 다리목 마을에서 3남 1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도 다른 가정과 마찬가지로 장남으로서 1962년 중학 졸업 이후 가업 계승과 부모 봉양을 위해 마을을 떠날 수 없었다. 그는 군 제대를 앞둔 24세 때 결혼해서 아내와 함께 부모님을 도와 줄곧 농사를 지어왔다. 1973년 무렵 처음에는 노지 수박과 수도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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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들이 앞장섰던 새마을운동 1960년대부터 시작된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의 활발한 추진으로 도시화와 산업화가 빠르게 추진되었지만, 이농 인구의 증가 등 낙후된 농촌 문제 해결이 절실하였다. 새마을운동은 이와 같은 상황에서 근면, 자조, 협동을 바탕으로 농촌의 근대화를 추진할 대안으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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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김씨 교리공파 교항계 종손 김해순 다리목 마을의 청도김씨는 ‘교리공파(校理公派) 교향계(橋項系) 문중’으로 일컬어진다. 한 곳에서 400년 넘게 지내오는 동안 입향조로부터도 벌써 15세, 16세손까지 태어났다. 청도김씨 교리공파 자손들만 전국적으로 1,000여 호에 이른다. 달성군 관내로는 다리목 마을을 중심으로 옥포읍 강림리, 법화리, 본리리를 비롯하여 논공면 등지에 산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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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김씨 입향조 창원공ㆍ유원공 원산 묘역과 향사 교항리 다리목 마을은 청도김씨의 집성촌으로 현재 80여 호를 이룬다. 1990년대 가장 많을 때는 120여 호에 이르렀다. 청도김씨는 성주 이씨 다음으로 다리목 마을에 정착해서 지금까지 커다란 문벌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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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김씨 재사 구목당 건립과 중건 구목당(九睦堂)은 다리목 마을 청도김씨 입향조인 처사(處士) 창원공(昌元公)과 선전관(宣傳官) 유원공(有元公) 형제의 공덕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한 재사(齋舍)이다. 구목당 명칭은 건립 취지를 대변하듯 위로 고조, 아래로는 증손에 이르기까지 입향조 후대 모든 자손들의 ‘화목’을 상징한다. 이러한 ‘화목’의 도리와 실천은 <구목당소지(九睦堂小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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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산신씨 종친 모임 덕은회 회장 신인섭 고려 개국 공신 장절공(壯節公) 신숭겸(申崇謙) 장군을 시조로 하는 평산 신(申)씨는 30여 호로 다리목 마을에서 청도 김씨 다음으로 큰 문중을 형성한다. 달성군 일대로는 조선 후기 3명의 형제들이 옥포의 교항리 다리목 마을, 신당 마을과 논공 금포 마을 등에 각각 정착, 세거하기 시작하면서 일대에 자손을 퍼트렸다. 현재 평산신씨는 다리목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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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중 낙동강 전투의 격전지 [한국전쟁 전반기 최후의 보루 낙동강방어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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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리1리 씩실마을은 낙동강의 범람에 의해 형성된 승호와 비슬산 자락의 끄트머리에 해당하는 산을 배경으로 형성된 마을이다. 〔자연환경이 준 마을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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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성군 논공읍 삼리1리의 지명은 자연을 배경으로 그곳에 살았던 주민들의 삶의 자취로서 역사적 산물이며 조상들의 생활과 정신이 반영된 문화유산이다. 지역의 언어로서 자연환경과 역사, 지리, 생활, 문화 등의 의미를 담고 있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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씩실마을 뒷산 너머에 있는 안건마을의 북동쪽 구릉 자락에는 논공읍의 낙동강 일대 고분군 가운데 가장 숫자가 많은 고분이 조성된 지역이었다. [달성군의 고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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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 제방공사를 통해 옥토로 변한 논공들 〔홍수 피해로 거친 밭이었던 논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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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이 만든 씩실마을의 젖줄기 승호 [달성군의 낙동강, 배후습지를 형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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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성군 논공읍 삼리1리는 고대 이래로 낙동강을 이용하는 교통의 중심지 가운데 하나였다. 특히 낙동강 건너 고령과는 왕래가 많았던 지역이었다. 그러한 교통의 중심에 무계나루터가 있었다. 〔낙동강을 따라 달성과 고령을 이어주는 무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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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리1리 씩실마을을 조성한 양촌 이난미는 당시 성주지역의 대표적인 학자였던 한강정구와 함께 회현서원에 배향되고 있는 광산이씨 삼처사 집안 출신이다. 〔한강정구와 삼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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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살림을 책임지는 부녀회장 박태연 부녀회장 박태연은 성주군 수륜면이 고향이다. 이 마을과 삼리 간에는 종종 혼사가 이루어 져 왔던 인연이 있던 곳이다. 풍족하지는 않지만 그럭저럭 살만했던 수륜에서 친척분의 중매를 통해 삼리로 시집을 왔다. 신랑은 6남매 가운데 장남이었다. 고향에서 벼, 보리농사를 하다가 시집을 오니 수박농사가 한창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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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의 굳건한 버팀목 이달국 이장 〔수박농사의 기운을 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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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의 화합을 주도하는 노인회장 이달우 〔식민지와 전쟁을 겪은 어린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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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마을운동으로 이룬 부자 마을 [마을 환경개선사업의 결실을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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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마을운동의 산증인 이산출 〔새마을운동 시범부락이 된 삼리1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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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호 곁에 먼저 자리잡은 동호 이서 〔삼처사 집안에서 태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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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호교 건설로 마을과 논공 들을 이어 [달성군 새마을운동의 선두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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씩실마을 주민들의 삶과 승호 〔마을주민과 함께한 승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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씩실마을을 만든 양촌 이난미 〔사촌 동호 이서의 권유로 낙동강을 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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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촌고택을 지키는 종손 이영수 〔광산이씨 중파 14대손으로 태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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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지배의 상징 신사가 마을 뒷산에 일제는 중일전쟁 이후 황국신민화정책을 추진하는 가운데 신사정책을 강화하였다. 신사정책은 치안 유지와 더불어 각종 종교단체를 전쟁에 협력시키는 수단으로 시행되었다. 또한 관민일체(官民一體)로 조선 민중을 전쟁에 동원하고자 하는 국민운동의 일환으로 시행된 것이다. 이를 위해 1936년 「신사제도 개정」에 대한 칙령을 통해 ‘일읍일면신사’(一邑面一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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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토농사를 주도하는 안건마을 토박이 정병만 작목반장 〔부친을 따라 마을로 이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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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개 자연마을 정대1리가 되다 정대1리는 안매남, 바깥매남, 평지마, 배정, 윙계, 한덤이 등 6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진 하나의 행정구역이다. 각각의 자연마을은 정착한 성씨들도 구분되는데, 먼저 안매남과 바깥매남은 김해김씨, 평지마는 제갈, 한덤이는 함안 조씨 그리고 배정과 윙계는 타성들로 구분된다. 이들 6개 자연마을은 용계천을 따라 골짜기에 위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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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으로 돌아온 작목반장 1959년생 올해 57년생으로 마을에서는 가장 어린 사람이다. 그가 기억하는 정대1리는 먹고 살기 어려운 매일이 힘든 동네였다. 그의 아버지는 좁은 농지에서 논농사로 생활하기 어려워 나무를 해서 팔았다고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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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향과 함께 이장을 맡다 정대1리 이장 김장생은 바깥매남에 정착한 매계 김주 선생 김해김씨 삼현공파 안매남 입향조 김주의 10대손으로 1940년 정대1리 바깥매남에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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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시 모퉁이, 경상북도 달성군 가창면 1984년 동아일보에는 ‘행정구역 불편한 곳 많다’라는 제목으로 전국에 행정구역으로 인해 생활권이 바뀌어도 조정하지 않고 버스 갈아타고 군청과 도시로 출근하는 곳에 대한 문제점을 제기하고 있다. 이 중 가장 첫 번째로 경상북도 달성군 가창면에 대한 이야기로 기사의 포문을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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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인줄 알고 시집 온 산호댁 1953년 김천이 고향인 이정남은 정대1리 한더미 마을 거주하는 남편을 만나서 결혼하였다. 얼굴 한번 보지 못한 남편에 대해 중매쟁이대구 산다는 이야기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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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간 오지 마을에 남은 전쟁의 흔적 무오사화를 피해 무인지대에 터를 잡았다고 하는 이야기처럼 정대1리는 험준한 산과 불편한 교통으로 소위 아는 사람들만 찾아올 수 있는 곳이다. 낙동강 부근과 군사적으로 중요한 이동 지역에 위치한 유학산 등에 위치한 마을과 달리 정대1리는 전쟁의 발발을 알 수도 없었던 산간 오지 마을이었다. 전쟁도 피해 갈 것 같은 조용한 정대1리 마을에 생각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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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매남에 자리를 잡은 매계(梅溪) 김주(金珠) 선생 가창면은 달성군의 서쪽에 위치한 곳으로 대구의 달서구와 남구, 수성구, 청도군, 경산시와 경계를 이루는 지역에 위치한다. 『대구읍지』(1997)에 의하면 대구 남쪽 12리 밖에 위치한 위화현(胃火縣)은 상촌창군(上村昌郡)으로 부르다가 신라 757년(경덕왕 16)에 수창군으로 고쳐 부르다가 이후 기록에서는 가창으로 기록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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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재해는 마을의 지형을 바꾸다 2003년 9월 한반도를 강타한 태풍 매미는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1904년 기상관측 이래 가장 낮은 최저기압의 대형 태풍이다. 1959년 9월에 발생한 태풍 사라가 952ha, 1987년 셀마가 972ha, 2002년 발생한 루사가 970ha인 반면 태풍 매미는 950ha로 가장 낮은 최저기압이다. 이 태풍은 경상남도 삼천포 해안에 상륙한 뒤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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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대초등학교의 설립과 폐교 정대초등학교의 모태는 1940년대 여상지 선생이 세운 정대사설강습소이다. 당시 인근에서 유일했던 가창소학교는 정대리의 학생들이 통학하기에 먼 거리였다. 이에 지리적 한계로 인해 학교를 갈 수 없는 학생들을 위하여 여상지 선생은 장학계를 모으고 학교를 세우게 된다. 이 결과 설립된 정대사설강습소는 1945년 4월 15일 용계초등학교 정대분교장으로 설립 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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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들의 힘으로 만든 헐티로 청도군에서는 지방도 902호선, 달성군에서는 군도 8호선으로 관리되는 헐티로는 가창댐에서 헐티재로 이어지는 정대1리의 유일한 자동차 도로이다. 대구광역시 달성군과 경상북도 청도군의 경계선인 헐티재로 이어지는 고개의 이름을 붙여 헐티로라 명명되었다. 도로의 총 길이는30.1km이며 경상북도 청도군 구간은 16.9km,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 구간은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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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대구 생활을 접고 고향에 정착하다 결혼 후 걱정은 아이들의 진학 문제였다. 정대1리에 소재하는 정대초등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은 인근 가창중학교로 진학하지만 이 또한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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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지마 유일의 제갈 성씨 6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진 정대1리 중 평지마는 제갈 성씨가 많이 거주했던 마을이다. 3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이곳 평지마에는 2015년 현재 10가구 이상 거주했던 제갈 성씨는 모두 이주하고 80년 넘게 마을을 지키고 있는 제갈익근씨만이 유일하게 거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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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1번 마을로 들어 온 삼천리 버스 1957~60년 마을에 처음 삼천리 버스가 들어왔다. 트럭도 올라오기 힘든 헐티로는 버스가 개통될 당시에도 돌만 가득한 도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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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발 700m 산으로 둘러싸인 마을 정대1리는 산으로 둘러싸인 마을이다. 안매남의 청룡산, 한덤이의 최정산, 그리고 평지마의 비슬산 등은 정대1리를 감싸고 있다. 먼저 청룡산은 해발 793m로 대구시 달서구와 달성군 가창면의 경계를 이루는 곳이다. 안매남의 뒷산으로 과거 안매남 사람들은 대구시 달서구를 가기 위해서 이곳 청룡산의 고개를 넘었다고 한다. 지금은 등산로가 조성되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