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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살림을 책임지는 부녀회장 박태연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B030204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마을/마을 이야기
지역 대구광역시 달성군 논공읍 삼리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송호상

[정의]

마을 살림을 책임지는 부녀회장 박태연

[강 건너 양반마을로 시집오다]

부녀회장 박태연은 성주군 수륜면이 고향이다. 이 마을과 삼리 간에는 종종 혼사가 이루어 져 왔던 인연이 있던 곳이다. 풍족하지는 않지만 그럭저럭 살만했던 수륜에서 친척분의 중매를 통해 삼리로 시집을 왔다. 신랑은 6남매 가운데 장남이었다. 고향에서 벼, 보리농사를 하다가 시집을 오니 수박농사가 한창이었다고 한다.

“양반 동네라고 시집을 와보니 친정보다 살림이 못한 거라. 처음에는 남들처럼 고생도 많이 했지. 시집 식구들도 많고 해서, 그라고 친정서는 벼하고 보리농사 했는데 여기 오니 수박농사를 하더라고...”

수박농사를 밭에서 하다가 비닐하우스를 만들어서 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대나무를 가지고 비닐하우스를 만들었다. 대만에서 대나무를 수입해서 그것을 잘라 비닐하우스를 만들었다. 처음 해보는 일들이어서 많이 힘들었다고 한다.

수박농사를 하다가 농토 문제 등으로 토마토 농사로 전환했다. 평생 토마토 농사를 지어 1남 1녀를 키웠다.

[활발한 새마을운동과 씩실마을 부녀회 ]

부녀회장 박태연이 시집 올 때인 1973년은 씩실마을이 수박농사를 통해 막 가난에서 벗어나는 중이었다. 그리고 1972년부터 새마을 운동이 박차를 가하던 시기였다. 그러한 새마을운동의 한 부분을 담당한 것이 부녀회였다.

씩실마을에서 처음 성과를 거둔 것은 마을과 삼리들 사이에 있는 씩실늪(승호)에 승호교 건설이었다. 이후 전개된 간이급수시설 설치를 위해 마을 주민들이 야간작업까지 실시하자 당시 새마을 부녀회에서는 주민들을 위해 야식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폐품수집과 쌀 절약운동, 그리고 구판장 운영을 통해 얻어진 수익금으로 마을을 위해 봉사하였다.

“집집마다 돌아가면서 장사를 했어요. 당시 마을에는 가게가 없었으니까. 살림에 필요한 거 좀 사가지고 팔아서 남는 거로 동네를 위해 쓰기도 하고...”

[씩실마을 부녀회 활동]

1970년대 초반 새마을운동이 전개될 때부터 있었던 씩실마을 부녀회는 현재 약 30여명의 회원이 가입되어 있다. 여느 마을의 부녀회처럼 40대부터 80대까지 폭넓은 연령대를 나타낸다. 회비는 일년에 만원씩 부담한다. 그 외 야유회나 마을 행사때 따로 기금을 모으기도 한다. 농협에서 지원하는 멸치나 젓갈 등 농수산품을 받아서 약간의 이윤을 붙여 팔아 행사에 보태기도 한다. 그리고 마을의 경로잔치 등 마을의 길,흉사에 참여하여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그리고 논공읍의 다른 동네 부녀회와 연합하여 김치바자회도 하고 군청에서 주관하는 벼룩시장에 참여하기도 한다.

박태연은 7대 회장이다. 회장의 임기는 2년 정도가 기본인데 형편에 따라 10년씩 한 분도 있다.

“마을이 집성촌이어서 부녀회 일하는데 편한점이 많아요. 나쁜 일이 있으면 서로 도와주고, 나이 드신분도 잘 챙기고 그래요.”

이제 부녀회장 2년차에 불과하지만 1973년에 씩실마을로 시집와서 지금까지 살아온 그 내공을 부녀회활동에 쏟고 있다.

참고문헌

『영광의 발자취-마을 단위 새마을운동 추진사』 제4집, (마을문고 본부, 1981)

[정보 제공자]

박태연(여, 1950년생, 대구광역시 달성군 논공읍 삼리1리 씩실마을 부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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