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B0101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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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江- 山-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마을/마을 이야기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성군 논공읍 삼리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송호상 |
[정의]
삼리1리 씩실마을은 낙동강의 범람에 의해 형성된 승호와 비슬산 자락의 끄트머리에 해당하는 산을 배경으로 형성된 마을이다.
〔자연환경이 준 마을 이름〕
삼리1리가 속해 있는 논공읍은 고려 이래로 성주군 노장면에 속해 있다가 1906년에 와서 행정구역의 변동과정에서 소속이 현풍군으로 바뀌었다. 이후 1914년 노장면의 중리동, 내리동, 외리동을 중심으로 하고 진두동까지 합쳐 달성군 논공면 삼리동(三狸洞)이 되었다.
여기서 ‘삼리’라는 지명은 중리, 내리, 외리를 합친 말이다. 그리고 삼리의 리(狸)는 삵괭이를 뜻한다. 이는 비슬산에서 마을 뒤쪽으로 뻗어 내려온 산의 모양이 마치 삵괭이같이 생겼다고 하여 사용된 한자인데, 당시에는 마을 이름이 ‘삵괭이골’ 혹은 ‘씩실’이라 불려 졌다고 한다. 또 다른 이름은 성호동(猩湖洞)이다. 여기서 성(猩)은 족제비과에 속하는 성성이를 뜻하는 한자이다. 그리고 마을 앞에는 낙동강이 만든 늪이 있는데, 위천쪽의 늪으로 물길이 이어지는 형상이어서 늪의 이름을 승호(承湖)라 하였고, 마을 이름을 승호동이라고도 하였다. 이후 1988년 동을 리로 개칭하면서 삼리리가 되었고, 1995년 3월 1일 달성군 전역이 대구광역시에 편입되었고, 이듬해 논공면이 논공읍으로 승격되면서 대구광역시 달성군 논공읍 삼리리가 되었다.
〔마을을 형성한 광산이씨〕
지금의 씩실마을을 일군 것은 광산 이씨(光山 李氏)들이었다. 당시 광산이씨들은 성주군 고탄리에 세거지를 이루고 살았다. 그런 가운데 성주지역 대표적인 유학자인 한강 정구의 존경을 받았던 ‘삼처사’ 가운데 모재 이홍우의 아들 이서가 먼저 건너와 승호(承湖) 위쪽에 집을 짓고 호를 동호(東湖)라 하면서 제자양성에 힘썼다고 한다. 이후 동호 이서를 통해 사촌인 이난미도 강을 건너와 승호 가까운 양지바른 곳에 마을을 일구었다고 한다.
성주 고탄의 광산이씨 문중은 비록 벼슬에 나서지는 않았으나 효행과 학문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한강 정구와 미수 허목 등 당대 대표적인 학자들이 존경해하면서 장가를 들었던 집안이었다. 마을에는 지금도 양촌공과 그 후손들이 남긴 양촌고택, 임호재, 승호서당 등이 남아 있다.
〔역사의 흔적을 간직한 마을〕
이러한 삼리 1리 씩실마을은 고대 신라와 대가야의 접경지역이었다. 이를 뒷받침하는 고분군이 마을 뒷산에서 발견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일제강점기인 1943년 12월에 ‘신사(神祠)’가 건립된 곳이었다. 지금은 대구와 현풍간 도로가 확장되면서 산의 흐름이 끊어져 있지만, 당시에는 비슬산의 흐름이 마을 뒷산 쪽으로 뻗어 내려왔으며, 비슬산 자락에서 해가 뜨면 제일 먼저 빛이 드는 곳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입지조건 때문에 인근의 현풍과 화원에 이어 신사가 마을 뒷산 정상부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신사 아래 부분에서 태평양전쟁 당시 전쟁물자 조달에 쓰였던 송탄유요(松炭油窯)가 발굴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6.25 전쟁 당시 이른바 낙동강전투의 격전지 가운데 한 곳이었다. 1950년 8월 초 대구 쪽으로 진격을 노리던 북한군이 낙동강의 폭이 좁은 삼리1리쪽으로 강을 건너 왔으나 승호를 파악하지 못해 미군의 반격을 받아 몰살당한 지역이었다.
〔특수작물로 부를 이룬 마을〕
낙동강의 잦은 범람으로 인한 홍수의 피해로 인해 가난을 면치 못했던 삼리1리 씩실마을은 1965년 낙동강 제방의 완공을 통해 옥토를 가지게 되었다. 이곳에서 논공수박의 재배를 통해 가난에서 벗어났던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새마을운동을 활기차게 전개하여 모범부락으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수박농사의 한계를 토마토와 양배추 재배로 돌파하여 마을의 번영을 이어가고 있다.
광산이씨 종손은 이 마을을 광산이씨 집성촌이 아닌 양촌공의 후손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라고 한다.
“여기는 광산이씨 중파(양촌공파) 후손들이 사는 동네라 합니다. 살기는 씩실에 살아도 죽어서는 고령군 성산면 고탄동에 있는 선영으로 가지요”(이영수)
“대부분이 집안 어른들이기 때문에 마을의 굳은 일이 있을 때에는 여느 마을보다 단결이 잘됩니다. 그리고 집안의 역사가 마을의 역사이기에 단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마을 발전을 위해 힘쓰지요”(이달국)
지금도 마을 구성원의 대부분은 광산이씨들이다. 117가구에 260여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마을의 농민들은 토마토와 양배추의 품질은 전국 최고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참고 문헌]
경북향토사연구협의회, 『경북마을지(중권)』(경상북도, 1991)
달성마을지편찬위원회, 『달성마을지』(달성문화원, 1998)
대구광역시ㆍ택민국학연구원, 『대구지명유래총람』(2009)
달성군청, 『대구의 뿌리 달성 제4권-달성을 누리다』(달성백서편찬위원회, 2014)
[정보 제공자]
이영수(남, 1939년생, 대구광역시 달성군 논공읍 삼리1리 씩실마을 광산이씨 중파 14대 종손)
이달국(남, 1965년생, 대구광역시 달성군 논공읍 삼리1리 씩실마을 이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