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B030102 |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마을/마을 이야기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성군 논공읍 삼리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송호상 |
[정의]
새마을운동의 산증인 이산출
〔새마을운동 시범부락이 된 삼리1리〕
삼리1리 씩실마을은 토마토와 양배추 농사를 통해 부촌마을의 명성을 얻은 곳이다. 그러나 196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낙동강의 홍수 피해로 인해 가난을 면치 못하던 마을이었다. 이후 1960년대 낙동강제방공사와 경지정리를 통해 논공들이 비옥한 안전답이 되었고, 수박농사를 통해 마을의 형편이 나아지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 1971년부터 전국에서 전개된 새마을운동이 씩실마을에서도 행해졌다. 마을의 첫 지도자는 이영곤이었다. 마을 환경 개선과 소득 증대를 위해 주민들과 처음 이뤄낸 사업이 승호교 건설이었다. 마을과 논공들 사이에 있는 승호(씩늪)으로 인해 다니기가 불편한 상황을 해결한 것이다. 이와 더불어 지붕개량과 마을 안길 확장 등 환경개선사업을 추진하여 성과를 거두었다.
이영곤의 뒤를 이어 교사출신 이숙현이 지도자가 되었다. 마을주민들과 합심해서 간이급수시설과 담장개량 등 주거환경개선사업을 진행하였다. 그리고 새마을회관 건립과 특수작물재배기술의 습득에 노력하였다. 그 성과를 인정받아 1977년 우수마을로 선정되었으며, 달성군 새마을운동의 교육장이 되었다.
[젊은 새마을지도자 이산출]
앞서 새마을지도자로서 큰 성과를 거둔 지도자들이 모두 광산이씨 집안이었다. 마을 주민의 대부분이 광산이씨 집안사람들이었기에 대소사에 협동은 어느 마을보다 잘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런 분위기에서 새마을지도자는 집안 어른들의 추천에 의해 정해졌다고 한다.
이산출은 1978년경부터 집안 어른들의 추천을 받아 3대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이미 시범부락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던 상황 가운데 마을 환경개선에 더욱 박차를 가하였다.
“당시 아직도 마을길이 좁았지요. 그래서 국도에서 옛날 마을회관 쪽으로 길이 있었는데 그 길을 넓히고 석축을 쌓았어. 리어카를 이용해서 돌을 나르고...초가집도 몇채 남아 있었는데 스레트 지붕으로 개량도 하고 했지요. (이산출, 남 74세)
이러한 마을 주거환경개선사업 이외에도 외국인 홍보를 위한 마을가꾸기 사업이라든지 마을 진입로 전면포장, 화장실 개량, 주택 도색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방송에서 부자마을로 소개되기도〕
이산출지도자와 마을주민들의 단합된 새마을운동의 성과로 마을의 생활환경은 한층 쾌적하게 변하였다. 그리고 무엇 보다고 주민 스스로 성과를 이루었다는 자부심을 가지게 되었다. 1984년 12월 kbs 이동스튜디오라는 프로그램에서 부자마을로 소개되기도 하였다. 1974년 호당 소득이 85만원이었는데 만 십년 뒤인 1984년에는 오백만원이 넘을 정도였다.
삼리1리 씩실마을이 가난한 마을에서 부자마을로 탈바꿈할 수 있었던 중요한 계기가 새마을운동이었다. 그 새마을운동을 이끈 광산이씨 문중의 지도자들 가운데 이산출 지도자도 있었다. 젊은 나이에 지도자가 되어 윗대의 성과를 이어 더 큰 결실을 맺어 나간 그 당시의 상황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참고문헌〕
『영광의 발자취-마을 단위 새마을운동 추진사』 제4집, (마을문고 본부, 1981)
〔정보제공자〕
이산출 (남, 1942년생, 대구광역시 달성군 논공읍 삼리1리 씩실마을 전 새마을지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