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C0102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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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마을/마을 이야기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정대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여수경 |
[정의]
산간 오지 마을에 남은 전쟁의 흔적
[6·25 전쟁과 함께 찾아 온 트럭]
무오사화를 피해 무인지대에 터를 잡았다고 하는 이야기처럼 정대1리는 험준한 산과 불편한 교통으로 소위 아는 사람들만 찾아올 수 있는 곳이다. 낙동강 부근과 군사적으로 중요한 이동 지역에 위치한 유학산 등에 위치한 마을과 달리 정대1리는 전쟁의 발발을 알 수도 없었던 산간 오지 마을이었다. 전쟁도 피해 갈 것 같은 조용한 정대1리 마을에 생각하지 못한 일을 경험하게 된다.
1946년 대구에서는 하나의 사건이 발생한다. 당시 대구부청(현 대구시청이며, 당시 대구부청은 오늘날 경상감영공원) 앞에서 계속되는 기아에 대한 대책 마련 시위가 행해지는데 이때 경찰의 발포로 민간인이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 사건을 계기로 여러 지역에서 배고픔과 기근을 해결해 달라는 시민들의 항쟁이 이어졌으며, 결국 경찰관과 군인 간의 물리적 폭력사태로 이어지면서 시민들 여러 명이 사망한다. 이후 참여한 많은 시민들이 대구 형무소로 수용되었다. 이 사건은 10월 항쟁 또는 대구 10·1사건 등으로 불린다. 당시 수용자들은 이후 1950년에 발생한 6·25 전쟁에 의해 재소기간과 상관없이 희생되는데, 이들이 강제적으로 묻힌 곳이 바로 칠곡 신동재와 경산시 코발트 광산 더불어 달성군 가창면 일대 달성광산이 위치한 골짜기로 알려져 있다.
[골로 간다 가창골로 간다]
1950년 7월 6·25 전쟁의 시작과 함께 정대1리 마을에는 달성광산으로 트럭이 들어온다는 이야기가 돌기 시작하였다. 1916년 일제강점기부터 운영된 달성광산은 일본인에 의해 경영되면서 파이프상과 망상광상을 채굴하는 곳으로 해방 후에는 중석광산으로 본격적으로 채광이 시작된 곳이다. 1994년 완전히 폐광된 후 이곳에는 극동아시아 최대의 초경 절삭공구 및 관련 산업제품 생산기업인 대구텍(주)으로 이전하여 운영되고 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달성광산에는 많이 근무하지 않았어요. 그래도 그 사건은 알죠. 밤마다 트럭들 오면 사람들 다니지도 못하게 했어요. 트럭에 사람이 한없이 실려 왔다고 해요. 거기도 모잘라서 저기 가창댐 인근에까지 해서 우리 마을에도 올라왔다는 이야기가 있어요(익명, 60대)
최소한의 법적인 심리를 거치지 않은 채 전쟁과 함께 이루어진 학살 사건은 10여 년 동안 세상에 드러나지 않았다. 이후 1960년 6월 대구 경북에서 자행되었다고 알려진 학살 사건을 위한 특별조사반이 구성되었다. 3일 동안 진행된 대구 가창과 경북 지역 조사에서 달성군 가창면 일대 조사는 진행 3시간 만에 마무리되었는데, 이때 조사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용계동 현 가창댐 앞에서 댐 준공 때 18가마의 백골이 나타나 맞은편 산으로 이장했다.
가창댐 학살 사건: 1950년 7월 중순 무렵부터 하순 사이에 가창댐에서 대구에서 온 군복부대(군인지 경찰인지 불분명)가 약 1백 50여명의 남녀를 데리고 와서 총살. (중략) 1주일 동안 수회에 걸쳐 약 1백 50여명의 남녀를 싣고 와서 총살했다는데 2트럭 중 한 트럭은 모두 젊은 여자만을 싣고 왔다고 함.
‘골로 간다. 가창골로 간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당시 가창댐 부근 가창계곡에는 많은 인원이 학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추정하건대 달성광산과 가창댐 인근 가창골에는 약 2,500여명의 사람들이 묻힌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건은 졸속 마무리가 되면서 아무런 결과를 보지 못한 채 세간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이후 2004년 국방부에서는 6·25 전쟁을 전후로 한 양민 학살 사건에 대한 의혹 해소를 위한 ‘군과거진상규명위원회’를 발족하면서 다시 가창 민간인 학살 사건이 재조명되었다.
[비슬산맥에 일어난 빨치산 소탕 작전]
6·25 전쟁이 끝난 후 퇴각하지 못한 북한군들은 한국의 곳곳에 잔류한다. 일명 ‘빨치산’들이라 불리는 이들은 일반적으로 지리산 주변에서 마지막까지 저항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대1리 사람들은 지리산의 빨치산이 아닌 ‘비슬산맥 빨치산’이라 부르며 이곳에서 잔류하던 빨치산들을 소탕했던 사건을 기억한다.
인민군은 안 지내갔는데, 넘어와가지고 7명쓱 8명쓱 뿔뿔이 흩어져가지고 (빨치산) 그래가지고 마냄이 그런데 땅굴 파가지고 한덤이 구멍을 뚫어가지고 현장에 가보니 굴을 뚫어가지고. 돌산 속에다가 넙덕한 돌을 깔아 놓으니께 암만 사진을 찍어도 사진이 안나오더라고예. 자기 들어갈 때는 납닥한 돌을 덜치면 들어가고. 그 빨치산들. 경찰이 몇차례 갖다 놓아도. 군인 다섯사람보다 못해요. 한달 넘게 있어도 못잡고. 군인 1개 소대 와가지고. 잡고 와서 보니가 원대가리는 인민공화국 만세해가지고 왔는데 철사줄가지고 꽁꽁 무까가지고 왔더라니까예. 그 사람들 군인아저씨가 서이뿐인가 전신만신. 우리가 다 봤는데 기억하지예.(김0고)
땅굴을 파고 잔류하던 북한군을 경찰관이 잡지 못하고 결국 군대 1소대가 출동했다. 마을 주민들 중에서는 전쟁에도 듣지 못한 총성을 전쟁이 끝난 후 들려 전쟁이 다시 시작된 줄 알았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도 하신다. 그렇게 6·25 전쟁은 끝나고도 오랫동안 마을에 머물면서 정대1리만의 역사를 만들고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