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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대구 생활을 접고 고향에 정착하다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C030202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마을/마을 이야기
지역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정대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여수경

[정의]

짧은 대구 생활을 접고 고향에 정착하다

[대구에서 짧은 1년 생활]

결혼 후 걱정은 아이들의 진학 문제였다. 정대1리에 소재하는 정대초등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은 인근 가창중학교로 진학하지만 이 또한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여기 있으면 중학교를 못 갔어. 가창중학교 가도 여기서는 못댕겼어 차가 없으니까. 할 수 없이 대구에 중학교를 가기 위해서. (우리 아) 학교 다닐 때 대구에 가가지고 평리 초등학교 선생님이 아(이) 담임이었어. 그 선생이 평리초등학교 가이소. 우리 집도 거 있습니다. 욜로 오소 하더라구. 그래서 평리초등학교 들어 가가지고 졸업했는데 (아이) 몸이 그래가지고 중학교 못 보내고. 고때 잠시 (대구에) 1년도 못 됐어. 고때 참았으면 어떻게 되었을라는지 모르겠는데. 그래가지고 그냥 들어왔어.

정대1리 학생들이 가창중학교에 다니기 위해서는 자동차로 편도 약 20분 이상 걸리는 도로를 아침저녁으로 걸어서 통학해야 한다. 더욱이 하루에 몇 번 들어오지 않는 버스를 통해 통학한다고 하여도 시간을 맞추기가 어려웠다. 이에 대부분의 정대1리 사람들은 아이들의 진학 때문에 이 시기가 되면 대구 시내 또는 다른 곳으로 이주하게 된다. 그 또한 아이의 진학 때문에 대구 이주를 결정하였다. 하지만, 6학년을 졸업한 뒤 예상과 달리 아이의 몸이 좋지 않게 되자, 곧 대구에서의 생활을 접고 다시 고향 정대1리로 들어오게 되었다.

[정대리 분동된 후 정대1리 이장이 되다]

그나마 먹고 살만했던 생활 덕분에 학교는 다니지 못했지만 집에서 한학을 배웠다. 그리고 군 복무시절 배운 자동차 기술과 서류 작성 등으로 마을에서 새마을지도자로 활동하면 궂은일을 도맡았다. 그리고 정대리가 1·2리로 분동된 후 정대1리 이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때 동네가 노나졌고, 그 뒤에 했죠. 주민들이 추대해가지고. 여러 사람이 있으면 거수가결 해가지고 하고. 그때 투표는 말이 있었는데 선거하자고 했는데 우리동네는 안하고 추천을 해가지고 할 만한 사람 해라. 나는 그 전부터 새마을지도자는 했는데.

넓은 면적을 관할해야 하는 정대1리 이장은 다른 이장들보다 부지런해야 했다고 한다. 안매남에서 저 위 한덤이까지 관할하기 위해서는 하루가 모자란다. 이장뿐만 아니라 가정도 돌봐야 했던 그에게 하루 24시간은 짧기만 하였다.

동장을 하면 다 봐야 돼. 그때는 전화도 없고 그러니까 다 봐야 돼. 자전거는 더하죠. 오르막 오를려면 식겁하는데, 내려 올 때는 (자전거를) 타지. 올라갈 때는 더 애를 먹어요. 그리고 소 몰고 시장도 갔지.

하루에도 몇 번씩 자전거로 1시간 거리의 가창면사무소로 오가야 했다. 내리막길은 그나마 다행이지만 오르막길은 자전거를 타지 못하고 걸어서 올라오기 일쑤이다. 하지만, 마을을 위해서 열심히 일했고 그 결과 정대1리 마을회관도 건립하였다.

[고향에서 보낸 70년]

군복무 기간 8년 그리고 대구에서 짧은 1년을 제외하면 그는 정대1리에서 70년의 시간을 보냈다. 군대에서 배운 자동차 기술로 한때 대구로 나가지 못했던 것을 후회한 적도 있었다.

내가 동촌 비행장에도 잠시 있었어요. 차가 고장나면 내 손 안거치면 못 가는기라. 어느 차도. 사천비행장에 있을 때도 내 손을 안 거치면 차가 못 나갔어요. 그길로 나갔으면 어떻게 되었을지 몰라.

그가 가진 자동차 정비 기술로 대구에서 생활하였으면 지금과는 다른 생활을 했을 까? 생활이 힘들거나 지칠 때면 때로는 시내에서 사업으로 성공한 친구들을 볼 때면 나가지 못했던 자신의 사정에 대해서 뒤돌아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맘이 편해진다. 넉넉하지 않지만 집 앞에 땅과 함께 60년 평생 자신을 믿고 따라 주는 부인도 함께 있다. 편안했던 삶은 아니지만 이제는 마음이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기기 시작하였다. 소달구지도 다기니 힘들었던 도로는 이제 자동차가 다니니 편안해졌고, 하루에 한번 들어오기도 힘들었던 버스는 1시간 한번 간격으로 다니고 있다. 그리고 자식들보다도 챙겨주는 이웃들이 때 되면 찾아와서 말동무와 함께 이런 저런 세상이야기를 할 수 있게 한다. 그리고 80세가 넘었지만 여전히 할 수 있는 일들이 있어 몸 쉴 틈이 없는 지금 그는 오히려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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