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A0203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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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大洪水- 仙女 - 金鷄山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마을/마을 이야기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성군 옥포읍 교항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박경용 |
[정의]
대홍수와 선녀 이야기를 품은 금계산
[닭이 알을 품은 형국의 지명 유래]
금계산(金鷄山)은 다리목 마을 동쪽에 위치한 해발 487.3m의 뒷산으로 앞쪽의 낙동강과 더불어 배산 임수(背山 臨水)의 형국을 이룬다. 금계산은 마주하는 대방산(大方山)과 함께 비슬산으로 이어지며, 풍부한 삼림과 수자원을 지니고 있다. 금계산과 대방산 사이의 계곡은 ‘선녀곡’으로 일컬어지는데, 여기서 발원하는 교항천(橋項川)은 선녀마을, 법화리를 지나 다리목 마을 들판을 적셔준다.
금계산은 여름과 가을 경치가 특히 빼어나다. 산 중턱 쯤에는 도마처럼 생긴 2개의 넓적한 바위가 놓여 있고 산봉우리에는 큰 바위가 우뚝 솟아있는데, 이로부터 ‘도마산’, ‘돌미산’이라고도 일컬어진다. ‘금계산’ 지명은 산의 지형이 마치 금빛 닭이 알을 품은 이른바 ‘금계 포란형(金鷄 抱卵形)’이라는 데서 유래한다.
[대홍수 설화와 금계산 지명의 상징성]
구전 설화에 의하면, 오랜 옛날 큰 홍수가 나서 낙동강이 범람하고 인근의 마을과 들판이 온통 물에 잠겼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과 동물들은 갈 곳이 없어 모두 금계산으로 피해갔다. 이때 찬연히 빛을 발하는 금계(金鷄) 한 마리도 홍수를 피해 덩달아 산 속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이로부터 후세 사람들은 ‘금계산’이라고 이름 지어 불렀다.
이 이야기는 산의 지형과 관련되는 금계산 지명 유래와도 상통한다. 동시에 다리목 마을 앞을 흐르는 낙동강물의 범람과 홍수, 부를 상징하는 금빛 참외 생산지로서의 옥토 마가들, 전란을 피해 몸을 숨긴 피난의 역사 등도 암시해준다. 오래 전에는 낙동강물이 마을 앞까지 흘렀으며, 홍수 시에는 범람하여 큰 피해를 입히기도 했다. 1965년의 대홍수 때만 해도 마가들이 물에 잠겨 마을 사람들이 대피하는 소동도 벌어졌다.
[선녀 이야기를 품은 금계산]
금계산은 대홍수 전설과 더불어 선녀곡(仙女谷) 지명과 선녀지(仙女池), 선녀마을, 선녀약천(仙女藥泉), 장부타령 민요 등의 선녀 이야기도 품고 있다. 선녀곡은 금계산과 대방산 사이의 계곡을 일컫는 지명이다. 이와 같은 지명들과 민요 타령의 모티브는 모두 선녀 이야기와 관련된다.
금계산과 대방산 사이의 계곡 구릉지에는 오래 전 세 집이 거주하는 산촌이 형성되어 있었다. 계곡물이 너무 맑아 하늘의 일곱 선녀가 여름이면 해마다 내려와 목욕을 했다고 전해진다. 실제로 계곡에는 맑은 물의 ‘삼탕 이천(三湯 二泉)’이 있었는데, 이후 매몰되고 남은 하나의 천(泉)은 부스럼 피부병의 일종인 피풍창(皮風瘡)에 특효가 있었다고 한다.
선녀곡과 관련해서는 목욕하는 선녀를 사모한 머슴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를 담은 민요도 회자된다. ‘선녀곡 옹달샘에는 하늘 선녀가 해마다 목욕을 하는데, 남의 집 머슴살이 용동이는 장가 꿈을 꾸다 마음에 병이 들어 심신을 옹달샘에 던지니, 하늘의 노여움을 받고 소낙비를 뿌려주네.’ 일대에서 전해오는 장부타령 민요 가사의 일부이다. 극심한 한발을 당해 비가 내리기를 바라는 마을 사람들의 간절한 소망을 담고 있다.
[격동의 난세에는 마을 사람들도 품어주고]
금계산은 해방 정국의 이념 대립과 6.25 전쟁 시기 마을 사람들의 은신처가 되기도 했다. 일부 좌익 인사들은 마을로 옮겨오기 이전의 금계산 자락 낙교재에 모여 활동 계획을 논의하고 연락을 위해 금계산 봉우리에 올라가 봉화(烽火)로 멀리까지 연락을 취하기도 했다.
“낙교재가 한 때는 봉홧불의 온상이 되기도 했어요. 거기서 의논해가지고 금계산 위에다 봉홧불을 놓기도 했어요. 연락을 위해 금계산 위에다 솔가지에 불을 놔가지고 고령으로, 어디로 연락 보내기도 했지요.“(김0린)
1950년 북한 인민군이 6.25 남침 후 파죽지세로 남하하자 국군과 미군을 비롯한 연합군은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하고 북한 인민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이 무렵 인민군 일부는 낙동강을 넘어 다리목 마을로 들어왔다고 한다. 낙동강 유역에 위치한 다리목 마을 사람들은 당 해 8월 금계산 계곡으로 피난 갔다. 피난민들은 인천 상륙 작전으로 인민군이 북으로 퇴각하기까지 1개월가량 이곳에서 숨어 지냈다. 이처럼 금계산은 위급한 시기 마을 사람들의 피난처가 되었다.
“6.25 전쟁 때는 금계산 선녀곡으로 피난을 갔지요. 양식이랑 밥해먹을 솥단지나 수저 등 기본 가재도구만 챙겨가지고 갔지요. 낙동강을 넘어오는 인민군 때문이지요. 인민군이 마을에도 들어왔어요. 한 달 정도 있다가 마을로 내려갔어요.”(김0린)
[참고 문헌]
달성 마을지 편찬 위원회, 『달성 마을지』(달성 문화원, 1998)
대구 광역시ㆍ택민 국학 연구원, 『대구 지명 유래 총람』(2009)
[정보 제공자]
김0린(남, 1930년생, 대구 광역시 달성군 교항리 다리목 마을 전 이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