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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701560
한자 書院
이칭/별칭 원우(院宇),원사(院祠),사원(祠院)
분야 종교/유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전라북도 군산시
시대 조선/조선,근대/근대,현대/현대
집필자 유재리

[정의]

유학 교육을 통한 인재 양성과 선현 배향(先賢配享)을 위해 전라북도 군산 지역에 세워진 조선 시대 사립 교육 기관.

[서원의 출현배경]

서원이 출현하고 활성화된 주요 요인은 첫째, 사림의 학문적 역량 축적과 수적 확대, 둘째, 도학(道學)을 추구하는 사림파들이 문묘 종사를 통해 선현을 숭상하고 학적 계통을 세우려는 노력, 셋째 수차례의 사화(士禍)로 훈구파에 패배한 낙향 사림들이 교육과 교화를 명분으로 향촌 활동을 도모한 점 등을 들 수 있다. 이를 통해 사림들은 향촌 사회에서 정치적 학문적 명분을 구축하였고, 그 구심처로 서원의 확대와 활성화를 도모하였다.

관학(官學)의 쇠퇴 역시 사학(私學)에 대한 사액(賜額)을 확대하고 서원 확산을 이끌어냈다. 조선 정부는 관학이 교수진 확보 등의 어려움을 겪자 국가적 차원에서 서원에 사액 조치를 통해 흥학을 도모하였으며, 이로 인해 서원의 확산에 영향을 끼쳤다.

[서원의 유래]

최초의 서원은 723년 당나라 현종이 궁중에 설치한 여정 서원(麗正書院)이다. 여정 서원은 몇 년 뒤에 집현전 서원(集賢殿書院)으로 개칭되었다. 그러나 이때의 서원은 주요 업무가 궁중의 서적을 보관하고 편찬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명칭만 같을 뿐 서원 본연의 기능과는 거리가 있었다. 서원의 면모가 갖추어져 그 존재가 알려지게 된 것은 북송대 백록(白鹿) 석고(石鼓) 응천(應天) 악록(嶽麓) 4대 서원이 세워진 이후였으며, 그 제도적 확립과 보급은 남송대 주자가 백록동 서원을 중건하고 활발히 강학(講學) 활동을 하면서 이루어졌다.

[서원의 설립과 변천]

우리나라에서 서원이라는 명칭은 조선 초기부터 보였다. 1420년(세종 2)에 강학을 목적으로 한 서원 설립을 독려, 김제와 광주 등지에서 사재를 들여 서원을 세우고 생도를 가르친 자들에게 정문(旌門)을 내려 포상한 사례가 있으며, 성종 대에는 사찰을 폐하고 서원을 세워 왕이 편액(扁額)을 내렸다는 기사도 보인다. 1461년(세조 7)에는 단성(丹城)에 문익점(文益漸)을 제향하기 위해 도천 서원(道川書院)이 세워지기도 하였다. 차이가 있다면 세종·성종 대의 서원은 강학(講學)을, 세조 대의 서원은 제향을 목적으로 세워졌다는 것이다.

선현 배향과 강학을 겸비한 서원은 1543년(중종 38)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세운 백운동 서원(白雲洞書院)이 최초이다. 백운동 서원은 고려 말 성리학을 처음 들여온 안향(安珦)을 배향하기 위해 세워졌지만, 사당 옆에 유생들을 위한 강학 공간을 마련하여 사(祠)의 기능과 원(院)의 기능을 갖춘 최초의 서원이 되었다. 백운동 서원은 풍기 군수로 부임한 이황의 노력으로 사액을 받아 소수 서원(紹修書院)으로 개칭되었다. 서원에 대한 사액 조치로 서적 배급, 토지 및 노비의 지급, 면세·면역 등의 특혜가 주어지자 지방 사족들은 서원 건립에 적극 참여, 전국 각지에서 서원의 숫자가 크게 증가하였다. 서원은 조선 후기로 갈수록 남설되었다. 그 성격도 학문 연마보다는 당파나 문중 관련 인물을 제향한 사당·사우(祠宇)의 특성을 띠며 재지 사족의 정치적·족적(族的) 기반 확대에 활용되었고, 점차 향촌의 이익 대변 집단으로 변질되었다. 남설된 서원은 고종 대 서원 철폐령에 의해 47개소를 제외하고 모두 훼철되었다.

[서원 건립의 의의]

서원은 강학을 통한 인재 양성과 학파의 재생산으로 성리학도의 저변 확산 및 성리 철학 심화에 기여하였다. 서원의 제향 기능 역시 학맥의 전승에 기여하였다. 전성기의 서원은 강학의 목적을 단순히 급제자 양성이 아닌 도학 정신의 체득에 두었기 때문에, 위기지학(爲己之學)의 본산이자 장수처(藏修處)의 성격을 띠었다. 이에 서원은 향촌 사회의 도덕적 구심으로 자리매김하며 도덕적 명분에 기초한 여론 정치 활성화, 학파에 뿌리를 둔 정파 즉 붕당 정치의 토대 마련에 기여하였다. 이를 토대로 서원의 건립 주체인 사족들은 서원을 향촌 자치기구화 하고, 향촌 사회에서 사족 지배 체제를 구축할 수 있었다.

[서원의 구조]

서원의 구조는 크게 강학 공간과 제향 공간으로 구분된다. 강학 공간은 유생들의 공동 강학처이자 회의 장소 등으로 활용되는 강당(講堂)과 유생들의 기거처인 재사(齋舍)로 구성된다. 재사는 성균관과 마찬가지로 동·서재로 구분된다. 외형상 건물 형태의 차이는 없지만, 위상을 따질 때 동재가 서재보다 높기 때문에 동재는 주로 유력한 양반 자제·연장자가 사용한다. 제향 공간은 사림의 정신적 지주가 되는 선현의 위패를 봉안하는데 보통 서원의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다. 규모가 큰 서원은 장판각 등을 보유하기도 하였다. 전성기의 서원은 제향과 강학의 기능을 모두 갖추되, 강학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정형화되었다. 이에 따라 전성기의 전형적인 서원 배치는 앞쪽에 강학 공간, 뒤쪽에 사묘 공간을 배치한 전학 후묘(前學後廟)의 구조를 이루었다. 그러나 후기로 갈수록 서원이 정치 세력과 재지 세력의 기반 확대 거점으로 변질되어 각 당파의 특정 인물이나 지역의 문중 인물 제향이 경쟁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이에 따라 서원 구조 역시 강학보다 제향 기능 중심으로 변화되었으며 후대로 갈수록 강학 공간 자체가 사라지고 사당화(祠堂化) 되어 갔다.

[군산의 서원 현황]

전라북도에는 60여개의 서원이 있는데, 군산 지역에는 염의 서원(廉義書院), 산앙 서원(山仰書院), 옥산 서원(玉山書院), 문창 서원(文昌書院), 치동 서원(淄東書院) 등 5개의 서원과 터만 남은 봉암 서원지(鳳岩書院址)가 있다. 건립된 서원 수는 적지만 조선 시대부터 근현대에 이르기 까지 여러 시기에 걸쳐 꾸준히 건립된 특징을 띠고 있다.

조선 시대 세워진 서원으로는 봉암 서원염의서원이 있다. 봉암 서원은 군산 지역에 가장 일찍 설립된 서원이다. 봉암 서원은 1600년(선조 33) 임피 현령 정시창(鄭始昌)을 중심으로 창건되었고, 1604년(선조 37)에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을, 1606년(선조 39)에 자암(自庵) 김구(金絿)를 배향하였다. 1635년(인조 13)에 사액을 받았으나 1868년(고종 5)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고 현재는 터만 남아 있다.

1685년(숙종 11)에 세워진 염의 서원은 1804년(순조 4)에 사액되었지만, 이 역시 고종 대 서원 철폐령이 내려질 때 폐쇄되었다. 이후 염의 서원은 1920년에 다시 설치되었다. 염의 서원은 군산시 유형 문화재 제5호로 지정되었다.

대한 제국 이후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처음 건립된 서원으로는 산앙 서원옥산 서원을 들 수 있다. 산앙 서원의 모태는 1876년에 세워진 낙영당(樂英堂)이다.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9대손 송병선(宋秉璿)은 1900년을 전후로 낙영당에 은거하며 후진을 양성하였는데,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 체결되자 그 철폐를 주장하다 순국하였다. 산앙 서원은 순국한 송병선을 기리기 위해 1908년(순종 2)에 건립되었고, 1922년 재차 건립되었다. 현재 낙영당은 명도사(明道寺)라는 사찰로 사용되고 있다. 옥산 서원(玉山書院)은 일제 강점기인 1929년에 처음 건립되었다. 문창후(文昌侯) 최치원(崔致遠)과 옥구 일대의 선현 14명을 배향하였다. 옥산 서원은 군산시 유형 문화재 제3호로 지정되었다.

현대에 들어 건립된 서원으로는 치동 서원문창 서원이 있다. 치동 서원은 1926년 세워진 치동원(淄東院)을 모태로 하고 있다. 치동원은 담양 전씨 종중이 결의하여 담양 전씨의 조상으로 구전되어온 중국 제나라 전횡(田橫)의 영정과 위패를 봉안하려고 처음 세워졌다. 그 후 1951년 담양 전씨의 중시조인 삼은(三隱)[전야은(田野隱), 전뇌은(田牢隱), 전경은(田耕隱)]을 추가 배향하였는데, 이 중에 뇌은·경은은 조선 건국기 고려에 충절을 지킨 두문동 72현에 포함되어 있다. 치동묘는 본래 어청도에 세워졌으나 1926년에는 둔율리, 1983년에는 원오곡 마을로 이전 건립되어 오늘날까지 이르렀다.

문창 서원은 1969년 고주장(高洙張) 등의 발의로 건립되었다. 옥구 자천대(紫泉臺) 일대에서 소요했다는 최치원(崔致遠)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최치원이 옥구에서 태어나 옥구 관리로 근무한 적이 있다고 하며, 서원의 편액은 1971년 박정희 대통령이 썼다고 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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