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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700425
한자 歷史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전라북도 군산시
집필자 김종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공격 시기/일시 660년 - 나당 연합군 백제 공격
특기 사항 시기/일시 1380년 - 왜선 500여 척 군산 지역 침입
설치 시기/일시 1624년 - 군산도에 별장 파견, 고군산진이라고 명명
개항 시기/일시 1899년 5월 1일 - 군산항 개항
설치 시기/일시 1899년 5월 5일 - 군산항에 옥구 감리서 설치
구 소재지 진성창 - 전라북도 옥구군 나포면 서포리

[정의]

전라북도 군산시의 역사

[선사 시대의 군산]

군산 지역은 북으로 금강(錦江), 남으로 만경강(萬頃江) 사이에 자리 잡고 있으며, 동쪽으로 익산 지역과 접하고 서쪽으로 바다에 면하고 있는 지역과 서해 상의 섬들을 포괄하고 있다. 군산 지역은 농수산 자원이 풍부하여 일찍부터 원시 어로민과 농경민이 거주하면서 선사 문화를 발달시켰다. 이에 군산 지역 각처에는 신석기 시대의 조개무지, 삼한 시대의 각종 토기와 철기 유물 등이 발굴되고 있다.

[삼국 시대의 군산]

군산 지역은 삼국 시대에 들어와 백제가 고구려의 남하 정책에 밀려 수도를 웅진[공주]과 사비[부여]로 옮기면서 정치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금강 하구에 위치한 군산 지역은 백제와 신라, 당, 일본 등 동아시아 각국들이 자신의 세력을 유지·확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확보하여야 하는 요지로 부상한 것이다. 이에 군산 지역[백강, 백강구, 기벌포, 진포 등으로 불림]에서는 660년 나당 연합군의 백제 침공 때 당나라의 13만 대군이 최초로 상륙하여 백제 국민과 전투를 벌이기도 하였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는 백제의 패망 원인으로 의자왕과 대신들이 성충흥수가 외적이 쳐들어올 때 백강을 지키라고 한 말을 제대로 듣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쓰여 있다. 이후 이것은 역사적 상식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실제 백제는 당나라 침략군을 백강에서 사수하였다. 이 전투에서 수천여 명의 백제군이 전사하였고, 당군이 입은 피해도 상당하였다. 당군이 입은 피해는 정사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삼국유사』나 오성산 전설, 천방사 전설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군산 지역에서는 백제 멸망 이후 663년 백제 부흥군과 일본의 구원병이 당군과 격전을 벌였으나 패퇴하여 백제 부흥의 꿈이 무산되었으며[백촌강 전투], 676년(문무왕 16) 신라의 대당 전쟁 당시 신라군이 당의 수군을 섬멸하여 우리나라 남부 지역에서 당의 세력을 완전히 축출하여 삼국 통일을 완수한 곳이기도 하다[기벌포 전투]. 즉 군산은 백제 멸망의 비운과 부흥군의 좌절을 맛본 곳이며, 신라에 의한 삼국 통일의 환희를 누렸던 곳이다.

[고려 시대의 군산]

고려 시대 군산에는 진성창이라는 조창이 설치되어 있었다. 남부 지방의 세곡을 해로를 통하여 수도에 실어 나르던 조운 제도는 고려 말 왜구의 노략질로 말미암아 조운이 불통함으로써 고려 왕조가 멸망했다고 할 정도로 국가 재정상 비중이 크고 중요한 제도였다. 고려는 건국 초에 한강 연안과 남부 해안에 12개의 조창을 설치하여 인근 각 고을의 전세를 거두어 보관하고 이듬해 봄에 경창까지 운반하도록 하였으며, 조선 역시 그 제도를 운용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고려와 조선의 조운 제도에서 군산을 끼고 있는 금강 하류는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고려 시대 군산에는 진성창[옥구군 나포면 서포리]이 설치되어 있어 여기에 보관된 곡식을 노리는 왜구가 자주 출몰하였다. 이에 군산 지역은 우리나라 최초로 화약 무기를 사용하여 왜구를 소탕한 장소가 되었다. 고려 말 국내의 정치, 경제, 사회적 혼란 속에서 밀어닥친 왜구의 침략은 40여 년에 걸쳐 고려 사회에 막대한 인적, 물적 피해를 입혔다. 1380년(우왕 6) 여름에는 왜선 500여 척이 군산 지역에 침투하여 삼남 연해 지방을 황폐화시키기도 하였다. 이 때 최무선이 화포를 이용하여 왜선을 섬멸하였다. 군산은 우리나라 최초로 과학과 기술력으로 왜구를 물리친 진포대첩의 현장이기도 하였다.

[조선 시대의 군산]

고려 시대에 군산에 진성창이 설치되었다면, 조선 시대에는 군산창이 설치되었다. 군산창중종 대에 설치되었는데, 이후 호남의 조운은 영광의 법성창과 군산의 군산창, 익산의 성당창 등 3조창에서 관할하였다. 그런데 법성창은 법성 만호가, 군산창과 성당창은 군산진 만호가 각각 관리하도록 되어 있었다. 즉 군산진군산창과 성당창을 모두 담당하여 호남 최대의 조세곡 운반을 관할하는 관청이었던 것이다. 조운을 담당하는 군인을 조군(漕軍)이라 하였는데 『여지 도서』에 기재된 조선 후기 전라도 조군의 수를 살펴보면, 법성창 1,280명, 군산창 864명, 성당창 569명으로 되어 있다. 단일 조창으로는 법성창이 제일 규모가 크지만, 군산진에서는 성당창과 군산창을 함께 관리하였으므로 군산진이 조선 최대의 조창 관할 관청인 셈이다. 즉 군산진은 조선 최대의 미곡 물류 관청이었던 것이다.

한편 조선 후기에 군산 앞바다에 있는 고군산도에는 조선 후기 최대의 수군진이 설치되어 있었다. 오늘날의 선유도는 원래 군산도라고 불렸다. 그런데 이 군산도에는 서긍의 『선화 봉사 고려 도경』에도 나타나고 있듯이 고려 시대부터 수군진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 고려의 수군진은 고려 말 왜구의 출몰로 폐지된 것으로 보이고, 수군진이 다시 설치된 것은 조선 후기인 1624년(인조 2) 무렵이다. 즉 1624년(인조 2)에 군산도에 별장(別將)을 파견하여 진을 설치하였는데, 이 진의 이름을 기존 진포에 설치된 군산진과 구별하고자 ‘고군산진’이라고 칭하였다. ‘고군산’이라는 명칭은 이때부터 널리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군산진이 조운을 담당하였다면, 고군산진은 해방(海防)을 담당하였다. 그런데 임진왜란 이후 황당선, 이양선이 서해에 자주 출몰하여 고군산진의 중요성은 계속 강조되었고, 군비가 강화되었다. 1746년(영조 22)에 편찬된 『속대전』에는 고군산진에 전선 1척, 병선 1척, 사후선 2척이 배치되었다. 그런데 1808년(순조 8)에 편찬된 『만기 요람』에서는 고군산진에 전선 6척, 병선 6척, 방선 2척, 사후선 10척이 배치되었다고 기재되어 있다. 당시 전라 우수영이 전선을 2척 보유한데 반해 고군산은 전선이 6척으로서, 우수영보다 무려 3배 이상이나 많은 전력을 구비하고 있었다. 고군산진은 이때 조선 전 수군 진영을 통틀어 최대의 군선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것은 이 무렵 황당선, 이양선 등이 서해에 빈번하게 출몰하여 취해진 조처로 생각된다.

[근대의 군산]

근대에 들어와 군산은 고종 황제의 칙령에 의거하여 자주적으로 개항되었다. 1899년(광무 3) 5월 1일 군산은 대한 제국의 결정에 따라 개항되었고, 개항과 동시에 대한 제국 정부는 군산에 감리서, 경무서, 재판소, 세관, 우체사, 전신사 등을 설치하였다. 특히 1899년(광무 3) 5월 5일에는 군산항옥구 감리서를 두어 정부로부터 개항장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한 권한을 위임받아 사무를 처리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각국 공동조계를 설치하고, 강안 매축 공사와 고정 잔교 시설 등을 시행하여 근대적 항만 시설을 갖추었다.

군산 개항은 대한 제국 정부가 열강 간의 세력 균형을 통하여 국가의 독립을 유지하고, 자유 무역을 통하여 국가 경제 발달을 꾀하며, 관세 수입의 증진을 통하여 국가 재정을 충실히 하려고 단행한 것이었지만, 개항 이후 나타난 결과는 대한 제국 정부의 기대와는 정반대였다. 군산 개항 이후 쌀의 대외 유출이 심화되었고, 조선 상인이 몰락하였으며, 일본인의 토지 침탈이 대대적으로 전개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국내의 산업을 보호하는 조치를 취하지 않고, 제국주의 세력에 대한 대비를 하지 않은 채 개방화 정책을 선택한 결과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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