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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701720
한자 籠球
분야 문화·교육/체육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전라북도 군산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조종안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30년 7월 - 군산 농구단 최초 설립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33년 6월 - 농구 구락부 창립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43년 - 홍문길, 오수철 등 군산 출신 선수들 귀향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46년 - 홍문길 군산 중학교 농구부 창단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48년 - 전라북도 농구 사상 최초 국가 대표 선발

[정의]

전라북도 군산 지역에서 양 팀이 각각 5명씩 팀을 이뤄 공을 상대팀 3m 높이 바스켓에 던져 넣으면 득점하는 형식으로 벌이는 경기.

[개설]

한국의 농구는 1907년 봄부터 황성 기독교 청년회 초대 총무인 미국인 질레트에 의하여 그 회원들에게 처음으로 전해졌으나 이듬해 질레트가 귀국하여 실질적인 지도 보급이 되지 못하고 기독교 청년회 야구 부원들이 농구공을 가지고 노는 정도에 그쳤다고 한다.

[해방 이전 군산의 농구]

군산에는 1930년 7월 농구단이 처음 설립되었다. 이때 전주와 농구 대항전이 정기적으로 열리면서 두 지역이 전북 농구의 산실이 된다. 1933년 6월에는 졸업 후 귀향한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농구 구락부가 창립되었다. 연락처는 군산부 소화통[군산시 중앙로 2가] 금삼 석판소 내에 두고 운영비는 회비로 충당했다.

회원 25명과 간부 4명[서홍선, 도병수, 박상규, 강봉준]으로 구성된 군산 농구 구락부는 창립 후 즉시 전주로 출정하여 완산 구락부와 경기를 가졌으나 31대 29로 석패했다. 그 후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여 완산 구락부를 군산으로 초청, 군산 보통학교[중앙 초등학교] 강당에서 설욕전을 펼쳐 56대 34로 대승하였다.

1943년 홍문길, 오수철 등 군산 출신 선수들이 귀향하여 군산 농구 구락부가 재창립됐고, 이후 5년 동안 전주와 봄·가을 2차례씩 정기적으로 친선 경기를 가졌다. 당시 군산팀은 홍문길, 오수철 외에 조봉구, 김점봉, 정구만, 조준구, 이명구 등이 주축을 이루었다. 홍문길은 연희 전문 재학 때인 1936년 일본 농구 선수권 대회에서 16점[최다 득점]을 따내며 우승의 주역이 되기도 하였다.

[해방 이후 군산의 농구]

광복 이듬해인 1946년 홍문길이 창단한 군산 중학교 농구부는 전국 규모 대회를 석권하며 농구 명문으로 자리를 잡는다. 오수철은 제17회, 제18회 일본 농구 선수권 대회에서 2연패를 이룩한 보성 전문 주역으로 활약하였고, 1946년 군산 상업 고등학교 농구부를 신설했으며, 1948년 전라북도 농구 사상 처음으로 국가 대표로 선발되어 제14회 런던 올림픽에 출전하였다.

군산 농구단은 광주에서 열린 제1회와 제2회 호남 농구 선수권 대회를 2연패하고, 대전과 대구, 부산 등 영남 지방 8개 도시 원정 경기에서 전승을 기록하기도 하였다. 이후 군산과 전주를 중심으로 농구팀 창단이 뒤따랐고, 이들 학교간 농구 대회가 열리면서 전라북도 농구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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