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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701433
한자 勞動運動
분야 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전라북도 군산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오영배

[정의]

전라북도 군산시 노동자들의 경제적·사회적 지위를 안정·향상시키려는 조직적인 운동.

[개설]

노동운동은 목적에 따라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된다. 첫째로 생산자로서의 임금 노동자들이 임금과 노동 시간 등 노동 조건의 유지·개선을 목적으로 벌이는 노동 조합 운동이다. 둘째로 선거권을 가진 정치적 시민으로서의 노동자들이 조직적인 활동을 통해 정치 활동을 전개하는 노동자 정당 운동이다. 셋째로 소비자로서의 노동자들이 노동의 재생산과 관련한 운동을 전개하는 소비 조합 운동이나 공제 조합 운동 또는 협동 조합 운동이다.

개항 이후 전북 지역의 곡물 반출항으로 자리 잡기 시작하였던 군산은 1920년대에 들면서부터 그 성장에 비례하여 노동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된 곳이었다. 1930년 10월 당시 군산의 총인구는 26,321명이었는데, 이중 17~59세의 남성이 9,358명이었다. 이 사이의 연령층이 직업별 노동 인구에 포함되는 것으로 간주할 때, 당시 군산의 노동 인력 중 약 40%는 어업 선박 및 그 연관업과 제조업 종사자들이었다.

군산 최초의 노동 단체는 1920년 8월에 결성된 노동 공제회 군산 지회였으며, 최초의 노동 쟁의는 같은 해 12월 군산 미곡상 조합 노동자들이 임금 인하에 대해 벌인 동맹 휴업이었다. 또한 1926년 6월 현재 전라북도 내에 존재하는 62개의 노동 단체 가운데 군산 지역에 분포된 단체가 가장 많은 것으로 들어나는데, 1920년대 군산 지역 노동 단체는 조선 노동 공제회 군산 지회[1920. 8. 13 창립], 토역 공사 조합[1922. 7 창립], 우마차 조합[1922. 12. 31 창립], 군산 노동 연맹[1922. 12. 15 창립], 군산 철공 조합[1925. 4. 10 창립] 등을 비롯한 약 30여개였다.

그런데 특징적인 것은 1920년대 초기부터 시작되는 군산의 노동운동은 서울 청년회의 지방 세력 확장과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초기 군산 노동 운동의 핵심적 인물은 김영휘(金永輝), 조용관(趙容寬), 장일환(張日煥)이었는데, 이들 가운데 군산의 국지적인 여러 분야의 움직임을 중앙과 연결시킨 인물은 장일환이었다. 장일환은 1923년 1월 15일 동경에서 결성된 북성회에 가담하여 중요한 활동을 하였으나, 1923년 7월 북성회에 대항하는 서울 청년회의 주요 인물로 전신하게 된다. 실제 군산의 노동운동이 서울 청년회와 연결된 것은 장일환이 서울 청년회에서 활동하게 되는 1923년 7월 이후가 될 것으로 짐작된다. 이를 반영하여서인지 군산의 노동운동이 한층 투쟁적인 모습으로 전개된 것 역시 1924년에 이르러서였다. 또한 1924년 3월 노동 친목회와 신흥 노조, 두 노동단체 사이에 있었던 충돌은 항구 도시 군산 지역에서 일어났던 노동운동의 한 전형이었다.

군산 지역 노동운동의 특징은 첫째, 일제의 자본은 조선 노동자들과의 직접적인 충돌을 피하고 그것을 같은 종류의 직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 사이의 노동권 확보 투쟁으로 돌려놓았다는 점이다. 둘째, 당시 여러 노동 단체의 지도적 인물들은 대체로 지식인들인데, 그들은 노동 운동을 민족 해방 운동의 일환으로 발전시켜 나가고자 하였지만 노동운동의 실천 현장에서는 민족적인 문제가 중심적인 문제로 부각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한편 이 시기 신간회 군산 지회신간회 운동 뿐 아니라 노동운동, 사상 운동과의 관계 등을 규명하기에 적당한 대상이다. 따라서 이를 통해 1920, 1930년대 군산 지역의 노동운동을 비롯하여 기타 사회 운동의 전개를 알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즉 신간회 군산 지회김영휘, 조용관을 비롯한 군산 노동운동의 중심 인물이 설립·주도하게 되며, 그들 대부분은 일찍이 사상 운동에 가담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1960년대 이후 자본주의 발전에 따라 한국의 노동 체제는 크게 세 단계를 지나왔다. 자본주의 발전 초기로부터 1987년에 이르는 약 30여 년에 가까운 기간에는 억압적 노동 체제가 구조화되었다. 이 체제에서 민주 노조는 1970년 전태일의 분신을 기점으로 태동했고 서서히 성장했다. 그것은 자본주의적 발전과 노동 억압의 모순 속에서 필연적인 현상이었다. 그러나 민주 노조가 본격적으로 대중적인 운동으로 발전한 것은 노동자 대투쟁 이후 1987년 노동 체제에서였다. 국가 자본의 억압과 노동 대중의 저항의 모순적 균형은 절차적 민주화라는 정치 상황을 계기로 하여 붕괴되었고 민주화의 노동 정치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후 1997년까지 10년의 역동적 노동 정치를 거치면서 노동 운동은 대중적이고 계급적인 민주 노조 운동으로 성장했다.

1960년대 이후 국가 주도의 수출 산업 육성 과정에서 대체로 소외된 군산 지역의 특성을 반영하여 1970년대에는 민주 노조 운동이 발생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경공업 중심, 내수 중심의 소규모 중소 기업들이 산재했던 산업 구성상의 취약성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당시 군부 독재 치하의 열악한 노동 조건과 노동 억압 상황은 군산 지역도 예외가 아니었고 대중적 저항은 필연적이었다. 1980년 서울의 봄과 광주 항쟁을 거치면서 노동자들의 의식은 서서히 깨어나기 시작했고, 이는 군산 지역 노동운동에도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해방 이후 보수적인 한국 노총에 의해 지배되었던 전북 지역에서 민주 노조 운동이 출현한 것은 1980년대 초반이었다. 그 시작은 1982년 태창 메리야스 노조에서 진행된 민주 노조 사수 투쟁이었다. 노동자들의 자발적인 노조 결성 움직임을 막는 과정에서 1980년 어용 노조가 출범한 태창 메리야스 노조는 1981년 민주 노조로 전환되었다. 그러나 제5공화국 초기 군부 정권의 민주 노조 말살 정책이 진행되는 가운데 노조는 정보 기관, 경찰, 한국 노총이 총동원된 강력한 탄압으로 붕괴되었다. 짧은 기간 진행된 민주 노조 활동과 연이은 노조 파괴에도 불구하고 태창 메리야스 노조는 군산 지역 민주 노조 운동의 출발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대중들의 자연 발생적 쟁의가 시작되는 가운데 1986년에는 새로운 형태의 쟁의가 발생했다. 1986년 군산 세풍 합판의 임금 인상 투쟁은 의식화된 노조 활동가나 지식인 활동가의 조직적 개입에 의해 발생한 투쟁이란 점에서 매우 특징적이었다. 군산 세풍 합판의 경우 군산 지역에서 ‘탄압 대책 위원회’가 결성되어 지역 수준의 연대 투쟁으로 발전했다. 지역의 종교인, 학생, 사회 단체는 목적 의식적으로 이 투쟁을 지원·지도했으며 지역 수준의 연대 투쟁으로 이끌고자 노력했다. 이와 같이 군산 지역에서 초기 민주 노조의 태동 과정에서는 외부 지원 세력의 활동이 중요한 계기로 작동했다.

1987년 여름에 폭발한 전국 노동자들의 대투쟁은 군산 지역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같은 해 4월 이리 후레아 훼숀에서 3개월에 걸친 노조 민주화 투쟁이 일어나고, 8월에 이르러 수많은 사업장에서 임금 인상 등 생존권 보장, 노조 민주화와 작업 환경 개선 등을 요구하면서 파업 투쟁이 진행되었으며, 군산의 세풍 합판, 세풍 제지, 우민 주철, 군산 여객, 우성 여객, 서안 주정 등에서는 파업과 함께 민주 노조가 속속 결성되었다. 대체로 보안 공안 정국 등 노동 탄압의 강화에도 불구하고 1989년까지 군산 지역의 노조 운동은 양적으로 확대되는 국면을 거치게 된다. 지역의 노동 단체, 해고자, 선진적 활동가들은 노조 결성과 쟁의 수행 과정에서 일정한 지원 역할을 수행했다.

1980년대 민주 노조 형성기 군산 지역의 노조 운동은 거시적으로 볼 때, 전국 수준의 민주 노조 운동의 발전과 그 궤적을 같이했다. 투쟁의 규모나 이념의 명확성 측면에서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거시적인 전개 과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1990년대 이후 기아 특수강, 대우 자동차 생산 공장이 군산에 입주해 가동되기 시작한 것은 성장 연합 세력과 노동운동 진영 모두에게 상당한 의미를 지녔다. 1993년 기아 특수강, 1997년에는 대우 자동차 군산 공장이 준공되었다. 이를 계기로 군산 지역 산업 구조에 괄목할 만한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전통적으로 제조업의 중심을 이루던 섬유, 음식료품보다 중화학 공업이 많은 비중을 점하게 되었다. 사실 대기업 생산 공장의 가동이 지역 사회에 지니는 의미가 단지 산업 구조의 양적인 변화에 있는 것만은 아니었다. 이 기업들이 군산 지역에서 생산을 시작했다는 것은 재벌 그룹 계열사, 금속 산업 부문, 종업 2,000명 이상 대기업 생산 공장이 지역 내에 최초로 입주했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들 대기업의 입주는 군산 지역 노동운동 진영에도 상당한 기대감을 주었다. 1980년대 말 중소 기업 중심의 민주 노조 운동의 한계에 직면해 있던 지역 노동운동 진영에서는 대기업 노동 조합이 보여주는 자원 동원 능력과 교섭력에 기대를 걸었던 것이다.

기아 특수강은 1991년 자동차 부품 사업 본부가 군산으로 이전했으며 이듬해 군산 공장을 가동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93년 본사를 군산으로 이전하면서 영등포와 인천 공장의 군산으로의 이전이 완료되었다. 그러나 1997년 IMF 외환위기의 시발점이 된 기아 그룹의 부도로 기아 특수강도 법정 관리에 들어가게 되었으며 채권단의 요구로 사측의 정리 해고 방침이 세워졌다. 노사 간의 협의를 통해 1998년 9월 노동 조합은 종업원 108명의 정리 해고에 합의했고 이에 반발해 사내 조직인 기아 특수강 민주 노동자회[기민노]를 중심으로 해고자 복직 투쟁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기아 특수강 노동 조합은 한국 노총에 가입되어 있으며 해고자 복직 투쟁의 주체라기보다는 오히려 대상이라고 볼 수 있다. 기아 특수강 민주 노동자회는 기아 특수강이 군산으로 이전을 완료한 이듬해에 결성되었다. 정리 해고 이후 해고자들은 출근 투쟁, 정문 앞 천막 투쟁 등 복직 투쟁을 전개했다. 물론 이 투쟁은 사측뿐 아니라 노동 조합의 철저한 외면 속에서 진행되었다.

대우 자동차는 1996년 군산 공장 직원을 모집하고 1997년부터 군산 공장을 본격 가동했다. 그러나 부평 공장 본조의 노동 조합과 사측 간의 합의를 통해 군산 공장에서는 노동 조합 설립을 3년간 유예하기로 했다. 다만 군산 공장 노동 문제를 전담할 전임자 3명을 부평 공장 본조에서 파견하기로 했다. 그래서 대우 자동차 노동 조합 군산 지부는 2000년 3월 1일에야 설립될 수 있었다. 대우 자동차 노동 조합은 2000년대 이후 가장 활발하게 지역 사회에 개입하고 있다. 대우 자동차가 부도 처리 되던 2000년대 초반에는 주로 기업 내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시민 사회와 연대하는 내용이 대부분이었으나 2002년 이후에는 미군 부대 문제 등 지역 사회의 의제에 깊숙이 개입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자원 동원의 한계 상황에서 외부와의 연대를 추진한 기아 특수강 복직 투쟁과 자체 역량의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초기부터 지역 사회와의 연대를 적극적으로 모색했던 대우 자동차 군산 공장 노동 조합은 지역 사회와의 연대를 통해 자원 지원, 여론 지지 확보 등과 같은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다. 특히 대우 자동차 노조의 경우 대우 자동차 문제를 이슈화해 시민 단체들과의 연대 투쟁을 조직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그 결과 이들은 지역 사회 개입 전략을 노동운동의 주요한 정책으로 채택하게 되었다. 결국 노동운동의 지역 사회 개입 전략은 위기에 처한 노동 운동이 새로운 권력 자원을 충원할 유력한 통로가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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