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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701205
한자 李仁植
이칭/별칭 호 춘고(春皐)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전라북도 군산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구희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01년 10월 22일연표보기 - 이인식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 이인식 3·1 운동 가담으로 10개월 투옥
몰년 시기/일시 1963년 3월 25일연표보기 - 이인식 사망
추모 시기/일시 2005년 10월 1일 - 월명공원에 이인식 동상 건립
추모 시기/일시 1962년 - 이인식 건국 훈장 독립장 추서
출생지 이인식 출생지 - 전라북도 군산시
활동지 이인식 활동지 - 서울특별시
묘소 이인식 묘 - 서울특별시 동작구 현충로 210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 경력 임피 중학교 교장

[정의]

일제 강점기 전라북도 군산 지역[옛 옥구] 출신 독립운동가.

[개설]

이인식은 보성 고등 보통 학교 대표로, 3·1 운동에 참여, 복역하였다. 중국 임시 정부에 군자금을 전달하고, 독립자금 모집 및 정보원으로 활약하였다. 해방 후 임피 중학교 2대 교장으로 취임하여 후진 양성에 힘썼다.

[가계]

전주 이씨(全州李氏) 시중공파(侍中公派) 성동파(城東派) 이태하(李泰河)의 3남 2녀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활동 사항]

이인식은 1901년 10월 22일 전라북도 옥구군 임피면 읍내리[현 전라북도 군산시 임피면 읍내리]에서 당시 옥구 지방의 거부(巨富) 이태하의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보성 고등 보통 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던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3월 1일의 시위에 적극 참여하였고, 3월 5일 진행된 남대문 시위에서 주도적으로 활동하는 한편 미국 영사관과의 연락 책임을 맡았으며, 전라북도 학생 대표로 활약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에서 10개월간 투옥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인식은 출옥 후 곧 옥구로 내려가 전답과 가옥 등 재산을 처분하고 만주로 망명하여 상해 임시 정부에 8천원을 헌납하였으며, 임시 정부에서 발행한 건국 공채(建國公債) 8매를 받았다.

[묘소]

이인식은 서울특별시 동작구 현충로 210 국립 서울 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 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독립운동사』3권(독립운동사 편찬 위원회, 1971)
  • 국가 보훈처 공훈 전자 사료관(http://e-gonghun.mpva.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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