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의병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701161
한자 義兵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전라북도 군산시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정원기

[정의]

개항기에서 일제 강점기 사이 전라북도 군산 지역 출신으로 일제에 맞서 무력항쟁을 전개했던 인물.

[개설]

대한 제국기 전개된 의병 항쟁은 항쟁 과정에서 보인 이념과 변화 양상에 따라 전기·중기·후기·전환기의병 4시기로 구분하여 볼 수 있다. 전기 의병은 유림이 주도하였으며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 시행 계기로 거의하였으며, 위정·척사·근왕적 성격을 지니고 진행되었다. 중기의병은 1904년 2월 한일의정서, 1905년 을사조약 체결을 계기로 봉기하였으며, 유림 중 관료 출신자의 주도자가 많은 가운데 평민 의병장이 참여하였다. 나라를 구하고자 하는 구국이념이 중심 이념으로 부상되었다. 후기 의병은 1907년 7월 고종의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 등이 계기가 되어 발생되었다. 민족적 규모의 의병 봉기로 해산 군인이 참전하여 전술적인 면에서 큰 전환을 가져왔다. 이 시기에는 충군·근대 국가 지향·반봉건 등 다원적이며 다양한 이념이 표출되었다. 전환기 의병은 남한 대토벌 작전 이후 국내에서의 활동이 어려워지자 만주와 연해주로 이주하여 항쟁을 지속하였다. 일제에 의한 강제 병합으로 의병에서 독립군으로 전환되었고, 계몽 주의자들의 근대 국가 이론을 결합하여 사상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대한 제국기 의병 항쟁은 군산 지역을 비롯한 호남 지역에서도 전개되었다. 다만 동학 농민 전쟁에 참여한 사람들에 대한 탄압이 강하여 전기 의병이 진행될 당시에는 활동이 미약하였다. 하지만 중기 의병 이후에는 최익현(崔益鉉)임병찬(林炳瓚)이 중심이 되어 창의한 태인 의병을 중심으로 의병 활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하지만 1909년 9월부터 2개월 간 일제에 의해 진행된 남한 대토벌 작전으로 인해 활동 근거지를 상실하고 많은 의병이 사살되거나 체포되어 독립 의군부(獨立義軍府), 임자 밀맹단(壬子密盟團)과 같은 비밀 결사단을 결성하여 의병의 명맥을 유지하였다.

[군산 출신 의병]

군산 지역 출신 의병으로는 임병찬·김덕장(金德長)·고봉민(高奉玟)·문형모(文亨模)·이준영(李俊榮)·전오풍(田五豊)·정홍기(鄭弘基)·이기준(李己準)·이용규(李容珪) 등이 있었다. 이들은 대부분 중기 의병 이후 전환기 의병 때까지 의병 전쟁에 참여하여 일제의 무력 침탈에 대한 항쟁을 지속하였다.

임병찬옥구 상평리[현 전라북도 군산시 옥구읍 상평리] 출생으로 32세 때 태인으로 이거하여 중기 의병 때인 1906년 3월 태인 무성 서원에서 최익현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그 후 태인에서 의병 모집과 의병 훈련 등의 책임을 맡았으며, 옥구·정읍·순창·곡성 등에서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1906년 6월 순창 전투에서 일본군과 격전하다 최익현과 함께 체포되어, 2년형을 선고 받고 대마도에 유배되었다가 1907년 1월에 석방되었다. 일제에 강제 병합을 당한 1913년 9월에는 고종의 밀지를 받아 독립 의군부(獨立義軍府)를 조직하였다. 독립 의군부를 통해 의병을 모집하고, 일제 통치의 부당함을 알리는 활동을 계획하였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하게 되었다.

김덕장·문형모·이준영·전오풍은 모두 옥구[현 전라북도 군산시] 출신으로 최익현임병찬이 중심이 되어 봉기한 태인 의병에서 참모장 및 일반 의병으로 의병 활동에 참여하였다. 또한 이들은 임병찬이 1913년 9월 조직한 독립 의군부에서도 활약을 하였다. 김덕장은 참모관으로 임명되어 격문을 발송하는 역할을 담당하였고, 문명호는 대한 독립 의군부 호남 통신국장에 임명되었으며, 이준영은 참모관 및 전라도 순무영(全羅道巡撫營) 경리 국장(經理局長)에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전오풍고봉민은 독립 의군부 창설에 가담하면서 옥답 등을 매각하여 거액의 군자금을 제공하였다. 이후 전오풍은 독립 의군부 만경 군수(萬頃郡守)로 고봉민은 전북 순무영 경리관(全北巡撫營 經理官) 겸 만경군 소모사(萬頃郡 召募使)로 임명되어 의병모집에 앞장섰다.

정홍기는 옥구[현 전라북도 군산시] 출신으로 일제가 1907년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군대를 해산되자 국가가 존망의 위기에 있다고 생각하며 의병 전쟁에 가담하였다. 정홍기는 전북 고산을 배경으로 활동했던 유지명(柳志明) 의병 진영에 들어가 고산군·용담군·전주 등에서 일제 침략의 첨병인 행정 기관들을 습격하여 파괴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의병 활동에 필요한 자금 확보를 위해 군수품과 군자금을 모집하는 활동에도 주력하였다.

임피[현 전라북도 군산시 임피면] 출신인 이기준정홍기와 같이 1907년 후기 의병 때 활약한 의병으로 정미7조약으로 대한제국의 내정이 장악 당하자 그 상황을 위기로 생각하였다. 이기준은 일제의 간섭을 타개하고자 주위에서 의병을 모집하거나 군자금을 수합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옥구 출신인 이용규는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실행되자 관직을 버리고 하향하여 주변에서 뜻이 있는 인물들을 규합하였다. 이후 을사조약으로 의병이 재기하자 의병 6~7백명을 기반으로 충청남도 홍주에서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실패하게 되었다. 1907년에는 전라북도 진안·용담·장수·무주 등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재차 홍주로 들어가 다른 의병장의 의진과 함께 대규모의 의병 전쟁을 전개하였다.

[군산에서 활동한 의병]

대한제국 때 군산 지역을 배경으로 의병 활동을 전개한 의병으로는 남광원(南光元)·김동구(金東九)·박이환(朴駬桓)·양창서(梁昌西)·서여장(徐汝長)·신내선(申乃善) 등이 있었다. 이들은 군산이 아닌 다른 지역 출신으로 군산 지역에서 활동한 의병장들이다. 이들이 군산 지역에서 의병활동을 전개한 까닭은 일제의 행정·사법 기관 및 상업 시설이 군산에 집중되어 있고, 그러한 시설에 종사하는 일본인 관리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또한 농장을 배경으로 한 일본인 지주들이 많이 기거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이 주 공격 대상인 의병들의 활동 장소가 될 수 있었다. 또한 의병에 대한 탄압이 가혹해지고 의병 전술에서 게릴라전이 유행하는 후기 의병에 와서는 군산 지역 인근에 위치한 섬 지방을 중심으로 게릴라전을 수행할 수 있는 지리적 여건이 충족되어 의병들이 활동이 전개될 수 있었다.

남광원은 경기도 부천 출신으로 1902년 10월 22일 광제원 사무 위원으로 임명되어 근무하다가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관직을 버리고 옥구로 내려왔다. 이후 고종의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 등으로 의병이 전국적으로 일어날 때인 1907년 7월 군산에서 일본군 기병 2명을 살해하고 권총 1정을 탈취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김동구는 출신지는 알 수 없으나 의병장으로 옥구·남원·임실·순창·태인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특히 1909년에는 김막동(金莫同)·김상천(金祥千)·박치근(朴致根)·한자선(韓子先)·박화숙(朴化淑)·최석봉(崔石奉)과 더불어 의병 부대를 조직하여 옥구군 성남면 유촌 일대에서 대일 항전을 위한 군자금과 군수품을 수합하는 활동을 벌였다.

박이환은 전라북도 익산 출신으로 중기 의병 때 결성된 최익현 의병 진영과 후기 의병 때 활동한 이규홍(李圭弘) 의병 진영에 소속되어 의병 활동을 하였다. 박이환최익현이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이규홍, 문형모와 함께 옥구·임피 등지를 돌아다니면서 의병 운동에 참여할 의병을 모집하였다. 또한 그의 형인 박영환(朴永桓)이 제공한 군자금으로 총기·탄환·화약·군도(軍刀) 등을 준비하여 의병 전쟁에 사용하고자 하였다.

양창서는 전라북도 순창 출신으로 옥구 및 전라북도 지방에서 활약했던 김동구 의병장 아래에서 김막동·김상천·박치근·한자선 등과 함께 의병 부대를 조직하여 옥구를 중심으로 군자금과 군수품을 모집하는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서여장과 신내선은 의병에 대한 탄압이 가혹해지자 군산 인근 섬 지방을 비롯한 서해안의 주요 섬 지방을 근거지로 하여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들은 후기 의병 때 사용된 게릴라 전술을 사용해 일제에 타격을 입히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