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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산면·임피면·서수면·개정면·대야면평강채씨 집성촌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700930
한자 聖山面臨陂面瑞穗面開井面大野面平康蔡氏集姓村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전라북도 군산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두헌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소재지 평강채씨 집성촌 - 군산시 성산면 지도보기, 임피면지도보기, 서수면지도보기, 개정면지도보기, 대야면지도보기 일대
성격 집성촌

[정의]

조선 시대 군산 지역[옛 임피현]에 세거한 평강채씨 집성촌.

[개설]

평강채씨(平康蔡氏) 소감공파와 목사공파가 조선 시대에 임피에 세거하면서 성산면, 임피면, 서수면, 개정면, 대야면 일대에 집성촌을 이루며 살아왔다.

[명칭 유래]

평강채씨(平康蔡氏)가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 대표 지역인 고봉리는 임피군 북일면 지역이다. 행정 구역 통폐합으로 만등리, 구이리, 식천리의 일부를 병합하여 고봉리라 해서 성산면에 편입하였다. 고봉리는 170m나 되는 높은 고봉산이 있다 해서 고봉리라고 불렸다.

[형성 및 변천]

평강채씨(平康蔡氏) 시조 채송년(蔡松年)은 1230년(고려 고종 17)에 홍주에서 일어난 최향(崔珦)의 난을 진압하였고, 1231년(고종 18)에는 몽골군이 침략하자 함경도 철주에서 북계 병마사로서 이들을 제압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1251년(고종 38)에 중서시랑 평장사를 지내다 사망하였다. 이에 경평공(景平公)이라는 시호(諡號)가 내려졌다.

채송년의 6세손인 채양생(蔡陽生)은 고려가 멸망하자 그 한을 품고 손자 채효손(蔡孝孫)과 재당질[7촌 조카] 채지생(蔡智生)을 대동하고 당시 임피현 성산면 대명리 향림곡에 있는 불사(佛舍)로 내려와 은거(隱居)하였다. 채양생채지생이 임피에 입거한 이후 후손들이 개정면, 대야면, 서수면 일대에 집성촌을 이루며 세거하여 왔다. 채양생의 후손들은 채양생이 소감을 지냈다는 연유로 자신들을 평강채씨 소감공파라고 불러왔고, 채지생의 후손들은 채지생이 목사를 지냈다는 연유로 자신들을 평강채씨 목사공파라고 불러왔다.

[현황]

1990년에 발간된 『옥구 군지(沃溝郡誌)』에 의하면, 당시 평강채씨성산면 성덕리 일대에 11가구 40명, 창오리 일대에 23가구 110명, 고봉리 일대에 68가구 340명, 도암면 창암 마을에 50가구 250명 , 임피면 영창리 일대에 27가구 81명, 서수면 화등리 일대에 20가구 84명, 서수리 일대에 25가구 111명, 마룡리 일대에 31가구 129명, 개정면 발산리 일대에 29가구 129명[신발산 마을 6가구 27명, 내방 마을 10가구 52명, 원발산 마을 8가구 29명, 남발산 마을 3가구 7명, 대황 마을 2가구 14명], 아산리 일대에 16가구 72명[원아산 마을 3가구 19명, 아산 마을 6가구 28명, 월령 마을 7가구 25명], 통사리 일대에 14가구 60명[거산 마을 1가구 6명, 장산 마을 6가구 25명, 신장산 마을 2가구 9명, 능동1 마을 1가구 2명, 능동2 마을 2가구 9명, 신동화1 마을 2가구 9명], 운회리 일대에 16가구 69명[당산 마을 11가구 45명, 송호1구 마을 5가구 24명], 대야면 산월리 일대에 11가구 56명[석화 마을 3가구 19명, 남흥 마을 3가구 12명, 오동 마을 5가구 25명]이 각각 집성촌을 이루며 살았다고 한다.

현재의 평강채씨 집성촌 현황에 대해서는 조사된 사례가 없어 정확한 내용을 알기 어렵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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