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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수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700697
한자 烽燧臺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전라북도 군산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조명일

[정의]

전라북도 군산시에 분포되어 있는 고대부터 조선 후기까지 통신 및 감시 시설.

[개설]

우리나라 봉수의 시원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아 언제부터 봉수를 사용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다만 『삼국유사(三國遺事)』 ‘가락국기(駕洛國記)’에는 ‘가락국의 시조 수로왕이 유천간과 신귀간을 시켜 망상도 앞바다에서 붉은 돛을 단 배를 발견하면 봉화를 피워 알리도록 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삼국사기(三國史記)』에도 봉산(烽山), 봉산성(烽山城) 등 봉수와 관련된 지명이 나타나고 있다.

또한 『구당서(舊唐書)』 ‘흑치상지전(黑齒常之傳)’에는 흑치상지가 당 고종에게 발탁되어 당나라로 들어와 토번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70여 개소의 봉화대를 설치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일본서기(日本書紀)』 계체기 8년(514)에는 반파가 자탄(子呑)과 대사(帶沙)에 성을 쌓아 만해(滿奚)에 연결하고, 봉화를 올리는 곳과 식량을 두는 창고를 만들어 일본에 대비하였다는 기록이 보이고 있다. 이러한 기록들을 통해 볼 때, 삼국 시대에는 이미 군사 통신상의 목적으로 봉수가 빈번히 사용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 봉수에 관한 구체적인 기록이 등장하는 것은 고려 시대 중기부터이다. 1123년(고려 인종 1) 중국 송의 사신 서긍이 쓴 『선화봉사 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에 의하면 송의 사신이 흑산도에 들어서면 매번 야간에는 항로 주변의 산 정상 봉수에서 순차적으로 횃불을 밝혀 왕성까지 인도하였다는 사실이 전해지고 있어 이전보다 더욱 발전된 봉수제가 운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1149년(고려 의종 3)에는 서북 병마사 조진약의 상소에 의해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횃불로써 신호를 전하게 하고, 평상시의 1회에서부터 그 위급함에 따라 4회까지 봉수를 피우게 하는 봉수식이 정해졌으며, 각 봉수에는 방정(防正) 2명과 백정(白丁) 20명씩을 두어 봉수를 운영하여 제도적으로 봉수제가 성립되었다.

그 후 원나라의 침입으로 인해 고려의 봉수제는 일시적으로 무너지게 되었다. 다만 『고려사(高麗史)』에는 1272년(고려 원종 13)에 삼별초가 합포(合浦)에 침입하여 몽고 봉졸(烽卒)을 잡아갔다는 내용이 확인되고 있는데, 이는 원나라가 고려의 봉수를 점령하여 자체적으로 재사용하였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고려 시대의 봉수는 고려 후기 왜구의 침입이 잦아들면서 다시금 복구·재편되는데, 1351년(고려 충정왕 3)에는 당시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의 송악산에 봉수소를 설치하고, 장교 2명, 봉수군 33명을 배치하여 지방에서 중앙으로 이어지는 봉수로를 구축하게 되었다.

고려 시대의 봉수제를 이어 받은 조선은 세종 때에 제도적으로 완전한 봉수제가 확립되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먼저 1419년(세종 1)에는 병조의 상소에 의해 2거였던 봉수 체제를 해상과 육상으로 나누어 그 위급함에 따라 5거체로 개편하는 한편, 봉수군에 대한 처벌 규정을 강화하였다. 또한 1422년(세종 4)에는 ‘경상도 수군 도안무 처치사(慶尙道水軍都安撫處置使)’의 상계(上啓)를 받아들여 각 도의 봉수처에 연대를 높이 쌓고, 그 위에 화기 등의 병기를 비치하여 주야로 간망하도록 하였으며, 같은 해 12월에는 병조로 하여금 의정부 및 육조와 더불어 봉수를 정하게 하였다.

1433년(세종 15)에는 한양에 목멱산 봉수를 설치와 더불어 지방의 5거 노선이 중앙에 집결도록 하였다. 이후 1433년(세종 15)에는 북방의 4군 6진의 설치와 병행하여 야인에 대한 방어책으로써 다수의 연대를 축조하였고, 1437년(세종 19)에는 각도 연변의 경계 지역에 있는 봉수에 연대 시설을 설치하여 봉수의 방어력을 높이는 한편, 1447년(세종 29)에 이르러서는 봉수의 거화수와 봉수의 시설, 봉수군의 상벌 제도 등을 『경국대전(經國大典)』 봉수 조(烽燧條)에 규정하여 봉수 제도가 완전히 확립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봉수제는 봉수군의 고역으로 인한 근무 태만, 시설의 미비, 보급의 부족 등으로 말미암아 그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빈번하게 발생하게 된다. 그 대표적인 예로 1478년(성종 9)에는 경상도 남해현 적량에서 사변이 일어났으나 순천 돌산포 봉수는 평시의 예에 의거하여 1거만을 하였으며, 1491년(성종 22)에는 함경도 경흥 조산보 여진족 침입과 1495년(연산군 1) 8월 전라북도 남도포의 왜적의 침입 및 같은 해 삼수군에 야인이 침입했을 때도 봉수를 올리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이 계속되자 봉수 제도는 1504년(연산군 10) 11월에 일시 폐지되었다가 1506년(중종 1)에 다시 부활되었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봉수의 폐단은 나아지지 않고 중간에 끊어지거나 대응봉수로 연결이 되지 않는 등의 문제가 매우 빈번하게 발생되었다. 특히 선조 때 이르러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일어났음에 불구하고 봉수를 올리지 않는 경우가 발생하게 됨에 따라 그 대책으로 1605년(선조 38)에 파발제를 도입하여 봉수제와 함께 실시하게 되었다.

봉수는 경비가 덜 들고 신속하게 전달할 수 있는 장점이 있으나 적정을 오직 5거의 방법으로만 전하여 그 내용을 자세히 전달할 수 없어 군령의 시달이 어렵고, 또한 비와 구름·안개로 인한 판단 곤란과 중도 단절 등의 결점이 있었다.

반면에 파발은 경비가 많이 소모되고 봉수보다는 전달 속도가 늦은 결점이 있으나 문서로써 전달되기 때문에 보안 유지는 물론 적의 병력 수·장비·이동 상황 그리고 아군의 피해 상황 등을 상세하게 전달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그러나 이 파발제는 봉수가 군사 목적 이외에는 이용될 수 없는 것과는 달리 관리들의 사목적 추구에 이용되어 사회 문제를 가져오게 되었다. 그리하여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봉수제는 점점 복구되었으며, 숙종 이후에는 기존의 폐단을 없애기 위해 ‘봉수 변통론(烽燧變通論)’이 제기되었다.

봉수 변통론의 주된 내용은 각자 거화론, 봉수의 이설과 가설, 마발(馬撥)의 배치, 화포 설치론 등으로 나눌 수 있는데, 각자 거화론은 1677년(숙종 3) 호조 참판 여성제의 건의에서 비롯된 것으로 봉수가 비·바람 등의 자연 장애로 인하여 차례차례 전달할 수 없을 때에는 최초의 거화하는 봉수에 관계없이 독자적으로 거화하자는 것이며, 봉수의 이설과 가설은 봉수의 설치간격이 너무 넓어 보고에 어려움이 따르므로 봉수와 봉수 사이에 간봉을 설치하자는 것이다.

또한 마발의 배치는 봉수제와 더불어 기존의 파발제를 동시에 실시하자는 것으로 1686년(숙종 12) 영의정 김수항의 건의에 따른 것이다. 화포 설치론은 1702년(숙종 28) 북병사 이홍술의 주장에 따른 것으로 봉수에 화포를 설치하여 소리로써 신호를 전달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봉수 변통론은 봉수의 거리 문제, 보급의 문제 등으로 인해 일부 봉수만 실시되었을 뿐, 봉수제 전반에 관한 개혁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이후 봉수제는 파발·역참 제도와 병행되면서 설치와 폐지를 거듭하다가 개항 이후 전신 전화의 가설로 그 기능이 약화되고 1894년(고종 31)에 팔로 봉수가 폐지되고, 그 다음해 각 지방의 모든 봉수가 폐지되었다.

[현황 및 특징]

현재 군산 지역에는 도서 지역에 6개소, 연안에 5개소 등 모두 11개소의 봉수대가 확인되고 있다. 연안에 위치한 봉수들은 그 수량이나 명칭 등에서는 일부 차이를 보이고는 있으나, 조선 시대 문헌 기록인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등에 기록된 조선 시대 순천 돌산도에서 시작하여 한성 남산까지 연결하는 5봉수로 5거 루트에 해당된다.

군산 지역의 봉수대 중 사자암·점방산 봉수 등은 15세기의 문헌기록에서는 확인되고 있으나, 18세기 이후에 제작된 고지도와 문헌 등에는 등장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임진왜란 이후 봉수를 재편하는 과정에서 폐지된 것으로 추정된다.

연안 봉수의 봉수간 거리는 대체로 12~16㎞로 타 지역의 연안 봉수 및 내지 봉수들 보다는 대응 거리가 짧은 것이 특징인데, 이는 서해안의 해안선이 매우 복잡하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또한 봉수의 입지는 주변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보다는 높이가 낮으면서 시계가 양호한 산 정상부를 택하였다. 특히 해안선에서 바다 쪽으로 돌출된 지형이나 포구와 인접한 산 정상부를 택해 봉수대를 축조한 것이 특징적이다. 이는 변방의 급보를 중앙에 전하는 봉수의 주된 기능과 함께, 해안으로 드나들던 선박의 감시와 안전한 항해를 돕는 등대의 기능을 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재 대부분의 연안 봉수는 허물어져 본래의 모습을 찾기 어려운 실정이며, 일부는 군사 지역으로 편입되어 있어 진입조차 어려운 상황이다.

반면에 군산 오성산 봉수[도진 봉수]는 훼손이 이루어지기는 했으나, 기초부가 잘 남아있기 때문에 향후 철저한 학술적 고증을 거쳐 정비·복원이 이루어진다면, 관광 자원으로 활용도가 높을 것으로 생각된다.

군산의 도서 지역에는 현재까지 6개소의 봉수대가 자리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도서 지역 봉수들 중 어청도 봉수들 제외하고는 조선 시대는 물론 이전의 문헌 기록에 전혀 등장하지 않고 있다.

어청도 봉수는 17세기에 씌어진 『비변사 등록(備邊司謄錄)』을 그대로 옮겨 적은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 외안도[지금의 보령시 외연도], 녹도, 원산도 봉수와 함께 충청 수영의 본거지였던 보령시 오천면의 망해정 봉수로 신호를 전달하던 기능을 담당했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또한 19세말에 씌어진 『대동지지(大東地志)』에는 어청도 봉수가 충청 수영과 관련된 권설 봉수[수군진, 수영 등에서 임시로 운영한 봉수]로 기록되어 있어, 전신 전화가 도입되어 우리나라의 봉수제가 완전히 폐지되는 19세기 말까지 운영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도서 지역 봉수들은 그 대지가 매우 협소하여 연안 봉수처럼 5개의 연조[불을 직접 피우는 시설]를 시설하기에는 무리가 있으며, 그 주변에서 고려 시대의 유물이 수습되고 있기 때문에, 축조 시기가 더 올라갈 가능성이 높을 것을 추정된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이 1123년 송나라 사신인 서긍이 편찬한 『선화 봉사 고려 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이다. 여기에는 서긍 일행이 이용했던 바닷길에 대한 상세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특히 서긍 일행이 흑산도에 다다랐을 때, 고려의 개경까지 불을 피워 뱃길을 안내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실제로 이 항해 루트 상에 있는 섬들에는 봉수대가 존재하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또한 야미도, 십이동파도 등 군산의 도서 지역에서 발견되고 있는 고려 시대 침몰선의 위치를 통해 보았을 때, 고려 시대 조운로도 서긍의 항로와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에 고려 시대 선박의 항해에 있어 봉수는 등대와 같은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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