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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700540
한자 群山米輸移出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전라북도 군산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정원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10년~1918년 - 조선 토지 조사 사업
전개 시기/일시 1920년~1934년 - 산미 증식 계획
전개 시기/일시 1932년~1940년 - 농촌 진흥 운동
전개 시기/일시 1939년 - 조선 미곡 배급 조정령 제정
전개 시기/일시 1943년 - 조선 식량 관리령 제정
성격 미곡 수탈
관련 인물/단체 웅본 농장|불이 농장|궁기 농장|천기 농장|군산 미곡 검사소

[정의]

일제 강점기 군산항을 통해 일본으로 미곡이 수탈된 양상.

[개설]

일제 강점기 군산은 미(米)의 군산이라는 별칭으로 통하기도 하였다. 전라북도와 충청남도의 비옥하고 넓은 평야에서 생산된 미곡들이 군산에 집산되어 일본으로 수탈되었기 때문이다. 미곡 수탈은 개항 이후 일본 상인과 자본들이 군산에 집중되며 시작되었다.

병합 이후에는 회사령, 객주 취체 규칙 시행으로 한국인 객주들의 활동과 회사 활동을 제악하였다. 조선 토지 조사 사업[1910~1918], 산미 증식 계획[1920~1934], 농촌 진흥 운동[1932~1940]을 통해서는 한국에서 생산되는 미곡의 생산량을 늘려나갔다. 1936년 중일전쟁 이후에는 조선 미곡 배급 조정령[1939], 조선 식량 관리령[1943]을 통해 산출된 미곡들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였다. 일제의 정책은 일본 내에서 값싸고 질 좋은 한국미를 유통시킴과 동시에 전쟁 수행에 필요한 미곡을 확보할 목적으로 실행된 것들이다.

일제의 정책이 시행되는 과정에서 군산은 인근 평야에서 생산되는 미곡과 그것을 운송해 낼 수 있는 항구를 가지고 있는 환경으로 미곡 집산지로 변화하였다. 일제 식민 당국과 자본가들은 미곡 수탈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철도 개통, 도로망 확충, 군산항 신축 등의 사업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일제 강점기 동안 군산은 상업 도시로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고, 군산항을 통해서는 많은 양의 미곡이 일본으로 이출되었다.

[역사적 배경]

일제가 한국을 식민지로 하였던 주된 이유는 일본 제국 주의 팽창에 따른 부족해진 식량·원료·자원을 값싸고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곳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또한 저임금의 노동력을 확보하여 자본가의 이윤을 확보해 주는데 있었다.

이를 실행하기 위해 병합 이후 조선 토지 조사 사업을 통해 농민들의 토지에 대한 권리를 박탈하고 부정하였다. 그 결과 조선 토지 조사 사업이 완료된 이후 한국 농민이 소유했었던 많은 토지들이 조선 총독부의 손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조선 총독부에서는 확보한 토지를 동양 척식 회사와 일본인 농업 자본가에게 불하하였다.

조선 토지 조사 사업 결과 군산을 비롯한 한국의 주요 평야 지대에는 일본인 농업 자본가들이 몰려들기 시작하였다. 군산에는 웅본(熊本)·불이(不二)·궁기(宮崎)·천기(川崎) 농장 등과 같은 일본인 소유 대형 농장이 설립되었다. 한국에 설립된 일본인 대형 농장을 중심으로 미곡 증산을 목적으로 수리 조합이 이어 설립되었고, 이를 통해 미곡의 생산량이 이전 보다 증가하게 되었다. 생산된 미곡들은 군산항을 비롯한 주요 항구를 통해 일본으로 수탈될 수 있었다.

[경과]

러일 전쟁 이후 한국에 대한 영향력이 강화된 배경으로 일본인 자본가들이 군산에 몰려들기 시작하였다. 군산에는 이전부터 미곡을 매개로 한 객주 조합이 발전한 상황이었지만, 일제의 무력과 그에 기반한 정책으로 군산 지역 객주들이 설립 기반을 잃게 되었다. 그 자리를 일본인 자본가들이 차지하게 되었다.

군산을 중심으로 인근 지역에는 일본인이 경영하는 대농장들이 개설되기에 이르렀다. 군산의 배후지인 충청남도와 전라북도 지역에서 생산되는 쌀의 수확량은 1910년~1920년 두 배 가량 증가하였고, 전국 생산량의 약 20%를 차지하였다. 이후 한국에서 생산되는 미곡에서 군산 미곡이 차지하는 비율은 1910년대 말 24%까지 상승하였고, 1930년대까지 꾸준히 상승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생산된 미곡은 군산 미곡 검사소와 주요 정미소를 통해 품질이 규격화되거나 가공되었다. 이렇게 생산된 미곡들은 일제 강점기 초 완성된 군산선 철도와 전주~군산 간 도로 등을 이용해 군산항으로 집산되었다. 집산된 미곡은 선박을 통해 일본 내의 수입상에게 건너가 판매가 되었다.

군산에서 일본으로 이송은 1901년(광무 5) 대판 상선(大阪商船)과 일본 우선(日本郵船) 등 일본인 회사가 개설한 직설 항로를 이용하였다. 군산에서 수탈된 미곡의 주요 수입 지역은 오사카[大阪], 고베[神戸], 도쿄[東京]였다. 일본 내에 수입된 미곡은 삼정 물산 회사(三井物産会社), 영본(鈴本)·아부(阿部) 상점과 같은 대자본의 미곡 무역 회사들을 통해 유통되었다.

[결과]

일제 강점기 동안 일제는 일본 내의 인구 증가와 그에 따른 식량 부족과 미가 등귀를 해결하기 위해 군산에서 수탈한 미곡을 활용하였다. 반면 미곡을 수탈 당한 군산 지역 한국인들은 삶은 피폐해 지게 되었다. 생산된 미곡을 강제로 일제에 빼앗기게 된 농민들의 미곡 소비량은 감소하게 되었고, 중국과 만주 등을 통해 이입되는 잡곡으로 연명하여야 했다.

일본인 농장주들은 미곡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군산 지역 농민들을 동원하여 수리 조합 개설에 동원하고, 생산된 미곡에 대해 고율의 소작료를 부과하였다. 이러한 수탈에 견딜 수 없는 농민들이 토지에서 이탈하여 군산과 같은 도시 혹은 만주 등으로 이주하여 토막민이나 열악한 환경에 처하며 살아가게 되었다.

[의의와 평가]

일제 강점기 동안 군산항을 통해 거래된 주 품목은 미곡과 관련된 것들이 많았다. 그 대상국도 일본으로 집중되어 있었다. 이는 일제가 한국을 식민 지배하면서, 한국을 식량 공급 기지로 이용했다는 사실을 나타내며 그 중심에 군산이 있다는 것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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