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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주조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700511
한자 客主組合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전라북도 군산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정원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개최 시기/일시 1928년 6월 18일 - 객주조합 혁신 총회 개최
발기 시기/일시 1933년 11월 25일 - 곡물 문옥 조합 발기
성격 상인 단체
설립자 군산 지역 객주

[정의]

일제 강점기 전라북도 군산 지역에서 활동한 사회주의 기반의 상인 단체.

[개설]

군산항 개항 이후 대한 제국 정부는 자본력이 부족한 국내 상인의 보호를 통해 상권을 보호하고, 외국 상인과 맞서기 위하여 객주 중심의 상업 정책을 실시하였다. 대한 제국 정부의 이러한 의지는 상회사 설립으로 나타났고, 군산 지역에서는 영흥사(永興社)·한흥사(韓興社)·창성사(昌盛社)와 같은 상회사들이 설립되게 되었다. 군산 지역 객주들은 이들 상회사를 중심으로 상품 판매와 납세의 의무를 수행하며 상업 활동을 펼쳐 나갔다.

하지만 러일 전쟁 이후 일제의 내정 간섭이 심해지면서 1905년(광무 9) 6월 메가다[目賀田種太郎]에 의해 실행된 재정 정리 사업으로 객주들의 활동은 위축되었다. 재정 정리 사업으로 외획(外劃)이 폐지되고 황실과의 연계가 끊어지면서 객주들은 활동 기반이 축소되었다. 외획 폐지로 취급 상품이 감소되었고 자금난은 심해지게 되었으며, 황실 재정과의 연계가 끊어지면서 객주들의 활동은 위축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조선 회사령」, 「객주 영업 규칙(客主営業規則)」, 「객주 취체 규칙(客主取締規則)」등이 공포되어 객주들이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이 차단되었으며, 일본 상인들의 이해가 반영된 정책들이 시행되었다. 일제는 기존 궁내부(宮内府)와 내장원(内蔵院)에 부속되었던 객주들의 권리를 부정하였고, 치안의 이유로 객주들의 상행위 대한 감시를 강화하였다. 행인과 행상들에 대해서는 새로운 통행료 명목의 분세를 징수하였고, 일본인 자본가 중심의 회사 설립을 통해 객주의 영업에 심대한 타격을 가하였다.

이에 객주들은 합자를 통해 자본 규모를 늘려 객주조합을 설립하여 대응해 나가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이때 설립된 객주조합은 동직자 조합 성격 단체로서 개항기 상회사와 차이점을 지니고 있었다. 일제 강점기 군산에 설립된 객주조합으로는 곡물 문옥 조합(穀物問屋組合)과 군산 해물 문옥 조합(群山海物問屋組合) 등이 있었다. 이들 객주조합은 큰 규모의 단체로 발전하지는 못했지만 미곡과 해산물을 중심으로 생산된 물건의 위탁 판매와 운송 등에 종사하였다. 또한 군산 지역 사회 주의 운동가들의 활동에 간접적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이들 객주조합의 활동은 이전 영흥사·창성사와 같은 상회사들에 비해 활동이 미진하였다. 그 이유는 일본인 자본이 중심이 된 대규모 회사에 금융업·운수업·창고업 등 기존 객주의 기본 업무를 빼앗기고, 객주 간의 유대 관계 형성을 차단하는 정책들이 시행되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일제 강점기 군산 지역 객주조합들은 설립되어 활동을 펼치기는 했으나, 작은 운송 업체나 시장에서 영세한 중간 도매상 혹은 위탁 매매상으로 전락하였다.

[설립 목적]

일제 강점기 「조선 회사령」에 의해 위축된 객주들의 연대 활성화 및 군산에서 생산된 미곡과 해산물의 유통을 위해 설립되었다. 설립 이후에는 생산자가 위탁한 미곡과 해산물을 중심으로 위탁 판매하거나 매매를 성립시켜 주며, 군산에 물산을 집중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변천]

일제 강점 이후 확인되는 객주조합의 활동으로는 1928년 6월 18일 군산 지역 객주들의 친목을 다지기 위해 객주조합 혁신 총회가 개최된 기록이 있다. 정확한 객주조합의 명칭은 알 수 없지만, 조합장 이원형(李源衡)·이춘성(李春成), 부조합장 이성서(李聖瑞), 회계겸 서기 편무송(片茂松), 평의원 김홍두(金洪斗), 양석주(梁錫柱), 이원형 등이 중심이 되어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1930년대에 들어서면 군산 지역 객주조합으로 곡물 문옥 조합과 군산 해물 문옥 조합이 있었다. 이들 조합은 모두 1933년도에 설립된 객주조합으로 설립 이후 미곡과 해산물을 중심으로 유통과 판매 활동에 종사하였다.

곡물 문옥 조합은 군산 지역 정미업이 쇠퇴하고 동시에 노동 인구가 감소되자 이를 개선하기 위해 1933년 11월 17일 김백룡(金白竜)을 중심으로 설립되었다. 설립 이후에는 군산에 많은 미곡의 집산을 위해 위탁 수수료와 노임을 반액으로 인하하였고, 공동 하역장을 설치하여 이곳을 통해 미곡을 매매하였다. 또한 군산부 동빈정(東濱町) 하물장에 임시 사무소를 개소하여 군산에 집중하는 미곡에 대한 위탁 판매업을 실시하였다.

군산 해물 문옥 조합은 군산 동빈어 시장(東濱魚市場)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한국인 객주들이 강제적으로 해산물 위탁 판매권을 빼앗기고, 판매 활동에 제약을 받자 이를 타개하기 위해 설립한 객주조합이다. 초기 간부진은 조합장 차덕노(車徳魯)와 40여 명의 조합원, 1,000여 명의 어민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설립 이후에는 새로 선임된 조합장 김형기(金炯基)를 중심으로 상품 판매의 자율성과 위탁 판매 중개 수수료 인하를 요구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곡물 문옥 조합과 군산 해물 문옥 조합이 중심이 된 군산 객주조합은 축소된 활동이기는 하지만 객주의 기본 업무인 위탁 판매 활동을 중심으로 객주업을 펼쳐나갔다. 그리고 일제 강점기라는 상황에서 군산 지역의 노동 운동과 독립 운동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던 사회 주의 운동가들의 활동을 도왔다.

곡물 문옥 조합과 해물 문옥 조합에서는 생산자로부터 위탁 받은 산물을 판매하거나 생산자들에게 돈을 빌려주는 대부업을 기본 업무로 하였다. 동시에 군산 지역 노동자들의 생활 안정을 위해 일자리를 제공하여 주었다. 주로 산지에서 집산된 산물의 하륙(下陸)을 필요로 할 때 군산 지역 노동 단체인 노동 공제회 회원들에게 종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문옥 조합이 중심이 되어 공동 하역장을 설치해 운반과 저장에 소요되는 비용을 절약하여 생산자의 수익을 보장하고자 하였다.

일제의 정책에 의해 객주업이 침해받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활동도 전개해 나갔다. 해물 문옥 조합에서는 자유 판매 금지를 내린 총독부의 지시에 반대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곡물 문옥 조합에서는 곡물 매매의 불합리한 점과 곡물가의 통일을 위해 가등(加藤)·조선(朝鮮)·장전(長田)·화강(花岡) 정미소가 설립한 군산 정미 공업 조합(群山精米工業組合)에 정조를 판매하지 않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1920년대에 활동한 객주조합에서는 군산 청년 동맹과 같은 지역 사회주의 운동 단체의 회의와 모임을 위해 회관을 대여해 주었다. 이 외에 군산 영신 학원(永信学院) 후원회 발기 대회를 개최 및 군산 지역 사회 운동 단체와 화합하여 계몽 활동을 후원하였다.

[의의와 평가]

일제 강점기 객주들은 개항장 상회사와 비슷한 객주조합을 설립하여 상권을 보호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하지만 그들의 활동은 「객주 취체 규칙」과 「조선 회사령」등에 의해 제약되었다. 더욱이 객주들은 일본 상인-객주-소매상-소비자 또는 일본 상인-객주-지방 행상으로 이어지는 유통 체계에서 일본 상인의 상권 확대를 방조하면서 그들의 하위 자리로 자리를 잡아가는 상황이 전개 되었다.

이러한 어려운 환경에도 군산 지역 객주들은 객주조합을 설립하여 일본인 자본과 결합하지 않고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비록 그 활동이 미비하기는 하였으나, 지역 노동자에 대한 일자리를 제공함과 동시에 일제 정책에 반대하는 활동을 전개하였고, 사회 주의 운동을 지원하는 등 나름의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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