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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정미인접노동 공동조합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700521
한자 群山精米籾摺勞動共同組合
이칭/별칭 군산 정미 공동조합,군산 정미 인접 조합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전라북도 군산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정원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개칭 시기/일시 1923년 11월 - 정미 노동 조합과 합병하여 정미 인접 공동 조합으로 개칭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24년 12월 22일 - 군산정미인접노동 공동조합 창립 5주년 축하식 거행
개최 시기/일시 1929년 1월 3일 - 군산정미인접노동 공동조합 제9회 정기 총회 개최
성격 노동 운동 단체

[정의]

일제 강점기 전라북도 군산 지역에 있었던 정미업 종사 노동자 권익을 위한 노동 단체.

[개설]

일제 강점기 군산은 미(米)의 군산 및 노동자의 군산이라는 별호를 가지고 있는 지역이었다. 전라북도와 충청남도 지역에서 생산된 쌀들이 군산항에 집산되었고 이로 인해 파생된 다양한 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이 많이 존재하였다. 특히 군산에 미곡이 집산되자 쌀을 저장하고 가공할 수 있는 정미소와 같은 시설물과 관련 직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이 많이 늘어나게 되었다. 당시 대표적인 정미소로는 화강(花岡)·흑전(黒田)·장전(長田)·조선(朝鮮)정미소 등이 있었고, 이곳에서 많은 노동자들이 정미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 정미소에서는 일본인 정미업자와 공장주가 중심이 되었고 노동자들은 허드렛일만 처리하고 있었다. 노동자들은 대부분 한국인이었으며 저임금에 장시간 노동과 일본인 자본가들로부터 인격적 모욕을 받는 등 일방적인 차별과 희생만 강요하는 체제가 지속되었다. 이들 정미소에 종사하는 한국인 노동자들은 이와 같은 불합리한 노동 환경을 바꾸기 위해 단결하기 시작하였고, 군산정미인접노동 공동조합(群山精米籾摺勞動共同組合)은 노동자들의 이러한 바람을 바탕으로 설립되었다.

설립 후 군산정미인접노동 공동조합의 대표적인 활동은 일본인 자본가들이 대표로 있는 정미소에서 한국인 노동자들의 일방적인 임금 인하에 반대한 투쟁이었다. 이들은 파업을 통해 자신들의 의견을 명확하게 표현하였고, 의견이 관철되지 않을 경우에는 연대 파업을 통한 노동자들의 단결된 모습을 보여 주었다. 일본인 정미업자와 공장주들은 군산 지역 상공업자와 경찰을 동원하여 군산정미인접노동 공동조합의 파업을 해산시키려 하였고, 장기전을 지속하며 이들의 요구를 불식시키고자 하였다. 하지만 군산정미인접노동 공동조합에서는 정미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을 규합하여 일제 자본가들에 끝까지 맞서 노동자들의 권리를 확보하기 위한 노력을 지속하였다.

[설립 목적]

군산 지역 각 정미소 노동자들에 대한 일본인 자본가들의 부당한 요구에 집단적 대응을 통한 노동자들의 권리 확보를 목적으로 설립하였다.

[변천]

군산정미인접노동 공동조합의 정확한 설립 시기와 창립 당시 명칭을 알 수 있는 자료가 현재는 확인되지 않아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다만 『동아 일보』1924년 12월 25일자 기사에 군산정미인접노동 공동조합이 창립 5주년이 되어 기념식을 개최했다는 기사의 내용으로 미루어 1920년에 창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1923년 11월에 비슷한 성격의 단체인 정미 노동 조합(精米勞働組合)과 반목을 없애고 협동을 도모하기 위해 이름을 ‘군산 정미 인접 공동조합(群山精米籾摺共同組合)’으로 개칭하였다는 내용을 보면 설립 당시에는 다른 이름으로 활동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군산정미인접노동 공동조합은 일제 강점기 군산의 다른 노동 운동 단체와 마찬가지로 사회주의 지식인이 운영의 중심에 있었다. 군산정미인접노동 공동조합에서 활동 했던 사회주의 지식인으로는 차주상(車周相), 이세환(李世煥) 등이 있었다. 조합의 운영은 정기 총회와 임시 총회를 통해 선출된 조합장과 임원을 중심으로 안건을 심의 의결하여 운영하였다. 임원 선출은 조합장과 부조합장은 투표식으로 선출하였고, 기타 임원은 공천으로 선출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위와 같은 방법으로 구성된 지도부는 군산 지역 각 정미소 노동자들의 임금 인하에 반대한 파업 투쟁을 전개해 나갔다. 이에 맞서 일본인 정미 업자와 공장주들은 군산 경찰과 연계하여 이들의 정기 총회나 친목 모임 등을 금지시키는 방법을 통해 활동에 제약을 가하였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군산정미인접노동 공동조합에서는 정미소 노동자들의 임금 인하에 반대하며 노동 운동 활성화를 위한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일제 강점기 군산 지역 정미 업자들은 군산 진흥이라는 명목 아래 미선공들의 임금을 인하하려고 하였다. 이에 정미 인접 노동 공동조합에서는 조합원이 중심이 되어 파업을 진행하며 요구 사항으로 임금 인하를 저지하려 하였다. 1924년 3월 16일 군산 낙합 정미소(群山落合精米所) 매가리공들이 일으킨 파업에서 그러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협력이 필요한 경우에는 협력을 통한 파업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그 예로 임금 인하와 시간외 수당 지급 문제를 두고 일본인 정미 업자들과 대치를 할 때 군산 미선회(群山米選會)와 합동으로 대응해 나갔다. 그렇지만 일본인 정미 업자들은 화강(花岡)·흑전(黒田)·장전(長田)·조선(朝鮮) 정미소를 중심으로 해서 임금 인하를 계속 시도하였고, 그때마다 군산정미인접노동 공동조합에서는 파업을 통해 그들의 시도를 저지하는 모습을 계속적으로 보여 주었다.

파업 활동 이 외에 군산정미인접노동 공동 조합에서는 노동 단체와 농민 단체의 합동을 통한 노동 운동의 활성화를 도모하였다. 이를 위해 조선 노동 대회와 같은 전국 단위 노동대회에 대표자를 파견하여 의견을 개진하는 등 노동 운동 향상에 노력을 기울였다. 또한 노동자 및 일반 민중들을 대상으로 사회주의와 노동 운동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강연회 활동도 전개해 나갔다.

[의의와 평가]

군산정미인접노동 공동조합에서는 일제 강점기 군산에서 정미업을 바탕으로 성장하였던 일본인 자본가들이 정미업 노동자들에게 행했던 민족 차별과 수탈에 대항한 노동 운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이들이 전개한 노동 운동은 노동 운동의 기본적 성격 이외에 일제 강점기라는 상황과 저항 대상이 일제였다는 점에서 민족 운동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참고문헌]
  • 『동아 일보』(1923. 11. 25, 1923. 12. 22, 1924. 1. 18, 1924. 4. 30, 1924. 12. 25, 1925. 4. 9, 1925. 8. 24, 1925. 9. 27, 1925. 12. 19, 1926. 11. 16, 1926. 11. 29, 1927. 3. 1, 1928. 1. 9, 1929. 1. 10)
  • 『매일 신보』(1930. 12. 1, 1931. 11. 29, 1931. 12. 8, 1931. 12. 10, 1931. 1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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