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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심사 폐사 사건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700453
한자 修心寺廢寺事件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전라북도 군산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김종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538년연표보기 - 수심사 폐사 사건 발생
발단 시기/일시 1538년 - 수심사 묘지 분쟁 발생
전개 시기/일시 1539년 - 수심사 폐사 건의
발생|시작 장소 수심사 - 전라북도 군산시 성산면 지도보기
종결 장소 수심사 - 전라북도 군산시 성산면
성격 사찰
관련 인물/단체 수심사

[정의]

전라북도 군산시 성산면에 있던 수심사(修心寺)가 조선 시대 폐사된 사건

[개설]

조선 시대 1535년(중종 33) 양반과의 묘지 조성 문제로 시작된 사건이 크게 번져 조정(朝廷)에 의해 수심사(修心寺)가 폐사(廢寺)되었다.

[역사적 배경]

불교를 국교로 삼았던 고려와 달리 조선은 숭유 억불(崇儒抑佛) 정책을 표방하며 양반 관료의 나라를 만들고자 하였고 이에 고려 왕조 500여 년 동안 자리 잡아온 불교계의 반발과 저항이 거셌다. 뿐만 아니라 고려와 조선 시대에 풍수 지리는 개인의 집안과 장래 길흉을 결정하는 중요한 사항이었고 불교와 유교 양측 모두 풍수 지리에 의한 길지(吉地)를 중요하게 여겼다. 따라서 수심사 폐사 사건은 조선 시대 숭유 억불 정책과 풍수 지리에 대한 깊은 관심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경과]

『조선 왕조 실록(朝鮮王朝實錄)』 1538년(중종 33) 기록에는 사헌부에서 아뢰기를 “소문에 의하면 임피현(臨陂縣) 수심사(修心寺) 산록에 어느 품관(品官)이 장사를 지내는데 광중을 파고 외관(外棺)을 내리자, 중들이 횡포를 부리며 장사지내지 못하게 하려고 절의 모든 중들이 각기 오물을 퍼가지고 와 관안에 가득 채우고 역군들을 난타하였습니다. 인하여 동냥하는 병든 중을 죽이고 이 품관이 죽였다고 소리치면서 그의 집으로 달려가 품관의 아내를 구속하여 갖은 곤욕을 보이고는 그의 옷을 벗기고 결박을 하였다고 하니 매우 해괴하고 경악스런 일입니다. 그래서 감사에게 추열(推閱)하라고 행이(行移)하였습니다.”라는 기록으로 수심사 사건이 언급되어 있다.

[결과]

조정(朝廷)에서는 수심사 사건의 파장이 커지자 전라도 경차관(敬差官) 박세옹을 임피에 파견하여 직접 사건을 조사하였다. 조사 결과 전 임피 현감 정사겸(鄭士謙)이 사적인 감정으로 스님들의 편을 들어 피해 양반 관리를 모함하였음이 밝혀졌고, 스님들을 추국한 결과 죽은 스님은 동냥하는 병든 중으로 사찰 측에서 죽인 후 양반관리 측과 싸움 중에 소문을 내었음이 밝혀졌다. 결국 사찰의 중들이 떼를 지어 양반에게 모욕을 가함은 큰 죄이니 사찰을 철거하라는 왕명이 내려져 사찰의 폐찰로 마무리 되었다.

[의의와 평가]

수심사 폐사 사건은 조선의 정치적 기반인 양반 관료와 고려의 사상적 기반이었던 불교와의 대립에서 비롯한 정치적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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