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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좌의 난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700451
한자 李麟佐-亂
이칭/별칭 무신란(戊申亂)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전라북도 군산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종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728년 3월 15일연표보기 - 이인좌의 난 발생
종결 시기/일시 1728년 4월연표보기 - 이인좌의 난 종결
발단 시기/일시 1694년 - 이인좌, 남인들을 포섭해 영조와 노론의 제거를 계획
전개 시기/일시 1728년 3월 24일 - 안성·죽산의 반군 소탕, 이인좌·권서봉·목함경 등 생포
성격 난(亂)
관련 인물/단체 이인좌|영조|경종|밀풍군

[정의]

1728년(영조 4) 3월 이인좌 등이 정권 탈취를 기도하며 벌인 난(亂)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군산 지역으로 유배 오게 된 사건.

[개설]

이인좌의 난은 전국적인 내란의 성격을 띠고 있어 실제 거병 지역과 반란 주도 인물에 따라 경상도에서는 정희량(鄭希亮)의 난, 전라도는 박필현(朴弼顯)의 난, 충청도는 이인좌(李麟佐)의 난 등으로 불린다.

[역사적 배경]

숙종 말년 소론은 세자[경종]의 왕위 계승을 지지한 반면, 노론은 경종이 즉위한 뒤 숙종의 유명(遺命)이라는 이유로 경종의 뒤를 이을 인물로 연잉군[영조, 1694~1776]을 지지하였다. 특히 경종이 젊은데도 노론 측은 경종이 병이 많고 아들이 없다는 이유로 연잉군의 세제 책봉과 대리 청정을 서둘렀다. 그러자 소론은 경종의 보호를 명분으로 신임 사화(辛任士禍)를 일으켰다. 그러나 경종이 재위 4년 만에 죽고 세제인 영조가 왕위를 계승하자 신임 사화의 옥사를 문책하게 되면서 노론의 지위는 회복되었다.

경종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자신들의 정치적 지위를 위협받게 된 박필현(朴弼顯), 이유익(李有翼), 심유현(沈維賢) 등 소론 인사들은 갑술 환국(甲戌換局) 이후 정권에서 배제된 남인들을 포섭해 영조와 노론의 제거를 계획했다. 그 명분으로 경종영조에게 독살되었다는 의혹과 영조숙종의 친 아들이 아니라는 것을 내세워, 영조를 폐하고 밀풍군(密豊君)[소현 세자의 증손]을 왕으로 추대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의도는 당인들을 결속시키고 그들의 모반을 정당화하였으며, 또한 민심을 규합하는 데 이용되었다.

[경과]

이인좌의 난은 1728년(영조 4) 3월 15일 이인좌가 청주성을 함락함으로써 촉발되었다. 이인좌를 대원수로 한 반군은 청주를 거쳐 한양으로 북상하였으나 병조 판서 오명항(吳命恒)을 사로도 순무사(四路都巡撫使)로, 박찬신(朴纘新)을 도순무 중군(都巡撫中軍)으로, 박문수(朴文秀)를 종사관(從事官)으로 삼아 난의 토벌에 나섰다.

관군은 1728년(영조 4) 3월 24일 안성·죽산의 반군을 소탕하고, 이인좌·권서봉·목함경(睦涵敬) 등을 생포하였다. 안성·죽산에서의 반군의 패보는 삼남 지방의 반군에 큰 타격을 주었다. 오명항이 이끄는 관군이 청주를 거쳐 4월 초 추풍령을 넘었을 때에는 영남 지방의 반군도 지방 관군에 의해 이미 소탕되었다.

[결과]

무신란(戊申亂)으로 인하여 군산 지역 특히 고군산군도 지역에 많은 관련 인물이 유배되었다. 영조고군산군도 지역으로 귀양 온 18명 중에서 1754년(영조 30)의 권똥이나 1757년(영조 33) 덕산 현감으로 금주 기간 중 술을 마셔 귀양 온 정동명을 제외하고 16명이 모두 무신란에 연좌(緣坐)되어 귀양 온 사람들이다. 『영조 실록』에 무신란의 역적으로 기론된 사람은 총 642명인데, 이중 62명이 극형에 처해지고 재산 몰수와 더불어 그 일가 친족이 연좌제에 따라 처벌 받았다. 이러한 무신란 주도층의 일가 친족 가운데 일부가 고군산으로 귀양 왔다.

1728년(영조 4) 6월 23일 둘째 아들 호손[5살]과 함께 귀양 온 민당효(閔堂孝)는 우의정 민암(閔黯)의 증손으로서 무신란을 주도한 민관효의 친척으로 연좌되어 고군산으로 귀양 왔다. 1729년(영조 5)에는 맏 아들 상손[10살]도 고군산으로 들어와서 합류했다. 또 1729년(영조 5) 7월 22일에는 무신란 당시 경상도에서 포수들을 이끌고 기병한 이태발(李泰發)의 부친인 이필(李弼)이 절도 정배율에 따라 고군산으로 귀양 오게 되었다.

1746년(영조 22)에는 무신란 주도층 이유익(李有翼)의 동생 이유필(李有弼)이 체포되어 처형되고, 이유필의 전처 소생인 12살 미순(美順)이가 고군산에 와서 비(婢)가 되었다. 1755년(영조 31)과 1756년(영조 32)에는 무신란에서 왕으로 추대된 밀풍군 탄(坦)의 조카, 이이석, 이순석, 이유석이 고군산에 와서 위리안치(圍離安置)되었다.

[의의와 평가]

영조 즉위 초부터 주창되어 온 탕평책의 실시는 그 명분을 더욱 굳힐 수 있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왕권의 강화와 정국의 안정을 도모할 수 있게 되었다.

이인좌의 난을 평정하는 데는 소론 정권이 앞장섰으나 주모자의 대부분이 소론이었기 때문에 이후 노론의 권력 장악이 가속화하였고 소론은 재기 불능 상태가 되었다. 이 사건 이후 정부에서는 지방 세력을 억누르는 정책을 강화하였고 토착 세력에 대한 수령들의 권한이 커졌다.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