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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700444
한자 群山島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지명/고지명
지역 전라북도 군산시
시대 고려/고려,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김종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변천 시기/일시 1627년연표보기 - 군산도에서 고군산도로 개칭
변천 시기/일시 1906년연표보기 - 고군산도에서 선유도로 개칭
비정 지역 군산도 - 전라북도 군산시 옥도면 선유도리 지도보기
성격 고지명
관련 문헌 『선화 봉사 고려 도경』|『고려사』|『조선 왕조 실록』|『신증 동국 여지 승람』

[정의]

전라북도 군산시 고군산 군도(古群山群島)의 옛 명칭.

[개설]

군산도(群山島)고군산(古群山) 군도(群島)의 옛 명칭이다. 고려 시대~조선 전기까지 선유도를 비롯한 고군산 군도군산도라 하였다. 군산도는 일찍부터 중국과 교류하는 남방 해상 항로의 경유지이자 군사적 요충지였다.

고려 시대에 이르러 군산 지역에 조창(漕倉)이 설치되고 중국 송나라가 고려와 교류할 때 북방 민족을 피하여 남방 항로를 이용하게 되면서, 군산도는 주요 조운로(漕運路)이자 중국과 통하는 해상 교류의 주요 거점이 되었다. 송나라 사신 서긍(徐兢)의 『선화 봉사 고려 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에 따르면, 서긍을 포함한 송나라 사신단 일행도 중국에서 출발하여 서해를 지나 흑산도를 거친 뒤 군산도에 머물렀다가 개경에 이르렀다.

조선 시대에 군산도의 군진(軍鎭)이 옥구현진포로 옮겨감에 따라, 군산도는 점차 고군산도(古群山島)라 부르게 되었다.

군산도는 현재 전라북도 군산시 옥도면에 속해 있으며, 군산에서 남쪽으로 약 50㎞ 떨어진 해상에 위치해 있다. 섬의 규모는 16개의 유인도(有人島)[16개 유인도 중에 야미도신시도 2개의 섬은 현재 새만금 사업으로 연륙됨]와 47개의 무인도(無人島)[이 중에 북가력도와 남가력도 2개의 섬은 방조제로 연륙됨]를 합하여 총 63개로 구성되어 있다. 현재 섬의 인구는 군산시 전체인구 가운데 1.7%를, 면적은 군산시 전체면적의 5.9%를 차지한다.

[명칭 유래]

군산도(群山島)는 바다위의 여러 섬들이 산봉우리처럼 무리지어 있는 것처럼 보여 붙여진 명칭이다. 오늘날 흔히 선유도로도 통칭되는 고군산 군도(古群山群島)는 고려와 조선 초기에는 ‘군산도’로 불렸다. 지금까지 전해지는 ‘군산도’ 관련 기록 중에 가장 오래된 것은 북송(北宋) 사신 서긍(徐兢)이 지은 『선화 봉사 고려 도경』이다. 서긍은 이 책에서 ‘군산도’라는 제목을 특별히 설정하여 자세한 기록을 남겼다. ‘군산도’라는 명칭은 이후에 『고려사』에서도 보이며, 『조선 왕조 실록』 곳곳에서 등장한다. 반면에 ‘고군산’이라는 명칭은 조선 전기의 『조선 왕조 실록』에서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고군산도’라는 명칭이 처음으로 사료에 보이는 것은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서이다. 『난중일기』 1597년 9월 21일자 일기를 보면 “아침 일찍 출발하여 고군산도에 도착했다”고 쓰여 있다. 이를 통해 '군산도'는 조선 중기 이후부터나 '고군산도'로 불렸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임진왜란 이후에도 『조선 왕조 실록』과 같은 관찬 사료에서는 한동안 '군산도'라는 명칭만 보인다. 『조선 왕조 실록』에서 ‘고군산’이라는 명칭이 처음으로 나타나는 것은 1627년(인조 5)의 기사이다. ‘고군산’이라는 지명이 본격적으로 쓰이는 시기는 아마도 군산도에 수군진이 세워지는 1624년(인조 2) 이후로 추정되고 있다. ‘고군산’이라는 지명으로 바꾼 까닭은 세종 때에 옥구현 진포 북쪽에 설치한 ‘군산진(群山鎭)’과 구별하기 위해 ‘고군산’이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동일한 권역에 이렇게 수군 진을 유사한 이름으로 두 개나 설치하는 것은 유례가 없는 일인데, 이것은 군산 지역의 경제적·군사적 중요성을 고려하였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고군산진이 설치된 이후에 ‘군산도’는 『조선 왕조 실록』 뿐만 아니라 여러 사료에서 주로 ‘고군산(古群(羣)山)’, ‘군산도(群(羣)山島)’ 등으로 불렸다. 이 명칭은 1906년 선유도라는 명칭이 등장하기 전까지 계속된다.

[변천]

군산도에 언제부터 사람들이 살고 있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선유도 진말 등지에서 조개무지가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청동기 시대 이전부터 사람이 살고 있었던 것은 확실해 보인다. 군산도가 역사상 처음으로 주목받게 되는 것은 660년 당나라의 백제 침공 때였다. 백제를 침공하고자 소정방이 이끄는 당나라 13만 대군은 660년 6월 18일 중국 산동성 내주(萊州) 성산(城山)에서 출발하여 6월 21일 서해 상의 덕물도[오늘날의 덕적도]에 도착하였다. 이때 덕물도에 가서 당나라군을 맞이하였던 신라 태자 김법민소정방과 더불어 7월 10일 사비성 남쪽에서 신라군과 당나라군이 합세하기로 결정하였다. 소정방이 거느린 당나라군은 덕물도를 출발하여 서해안으로 내려가 7월 9일 기벌포[오늘날의 금강 하구]에서 상륙을 시도하였다. 이 과정에서 약 10여 일이 소요되었는데, 이 기간에 당나라군은 물을 구하고 상륙 준비를 하기 위해 어딘가에 정박하였을 것이고, 정박지는 금강 하구의 근처인 군산도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이와 같이 군산도에서 10여 일을 보낸 당나라군은 660년 7월 9일 오늘날의 군산 방면으로 상륙 작전을 전개하였다. 이것이 660년 백강 전투이다.

660년 백제 멸망 이후 통일 신라 시대를 거쳐 918년 고려가 건국되자, 송(宋), 일본, 유구(琉球)를 비롯하여 멀리 대식국(大食國)[아라비아] 상인까지 고려에 왕래하였다. 고려의 수도 개경은 세계인이 왕래하는 국제도시가 되었고, 개경의 문호인 벽란도는 국제 무역항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이들 상인들을 통하여 ‘Korea’란 이름이 서방 세계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특히 고려의 대외 무역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송과의 무역이었다. 고려와 송과의 무역 항로는 산둥 반도에서 황해도 연안을 거쳐 예성강 구에 이르는 직선 기선이 이용되었으나 뒤에는 거란의 세력이 커지자, 이를 피하여 명주→흑산도→군산도→벽란도에 이르는 남해안 우회 항로가 많이 이용되었다. 이로써 군산도는 고려와 송나라 사이에 중요한 기항지 역할을 하게 되었다. 1123년에 송나라 사신으로 왔던 서긍(徐兢)은 『선화 봉사 고려 도경』에 군산도에 관한 자세한 기록을 남겼다. 『선화 봉사 고려 도경』에 의하면 군산도에서 군사들로 무장한 6척의 배를 보내 송나라 사신을 호위하게 하고, 섬에서는 1백 명의 군사들이 깃발을 들고 도열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군산도에는 사신을 접대하기 위한 객관으로 쓰인 군산정(群山亭)이란 건물이 있었는데, 그 뒤에 두 봉우리[망주봉으로 보임]가 있었다는 것으로 보아 이 군산정은 오늘날 선유도의 양당리(陽唐里)[오늘날 양댕이라고도 부름, 선유 3구] 부근에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한편 군산도에는 관청 건물 10여 칸이 있었고, 서쪽으로 오룡묘(五龍廟), 자복사(資福寺), 숭산 행궁(崧山行宮) 등도 위치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고려 시대에 군산도는 서해안의 중요한 군사 기지 역할을 하였다. 무장한 군사를 실은 배가 송나라 사신의 배를 호위하고, 또 섬 안에는 1백여 명의 군사들이 도열하고 있었다고 할 정도로 군산도에는 다수의 군인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군산도에는 배를 만드는 조선소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서긍은 『선화 봉사 고려 도경』에서 군산도에서 만든 송방(松舫)이라는 배에 대해 언급하였다. 송방군산도에서 만든 배인데, 그 형태는 앞과 뒤가 직선인 네모꼴로서 고위 관료층만 타는 극히 화려한 배라는 것이다. 군산도에는 송방과 같은 특수한 배를 제작하는 조선소도 있었다.

12세기에 송과의 교류가 왕성할 때 군산도는 국제 교역의 거점 항구로서 번영을 누렸다. 그러나 13세기에 들어와 고려가 몽골의 침략을 받게 되면서 군산도는 피난민의 집결지와 대몽 항쟁 세력의 근거지로 기능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1270년 고려 정부가 몽골과 강화를 맺고 개경으로 환도하자 대몽 항쟁에 앞장섰던 삼별초는 배중손의 지휘 아래 반기를 들었다. 1270년(원종 11) 6월 1일 삼별초는 난을 일으켜 강화도를 점령하고 왕족 승화후(承化侯) 온(溫)을 추대하여 고려왕으로 삼았다. 그리고 3일 후인 6월 3일에 1000여 척의 배를 동원하여 공사(公私)의 재화와 사람들을 모두 싣고 강화도 구포(鳩浦)를 출발하여 남쪽으로 향했다. 최종 목적지 진도에 도착한 것은 강화도를 떠난 지 70여 일 만인 8월 19일이었다. 강화에서 진도까지 항해하는 데 70여 일이라는 긴 시일이 소요된 내막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다. 그런데 강화도에서 진도로 항해하는 길목에 군산도가 위치하고 있었으므로 삼별초가 군산도에 정박하였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오늘날까지 군산도에 왕릉이 있었다는 기록이 다수 전해 내려오고 있다. 『신증 동국 여지 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만경현 조에는 군산도에 왕릉과 같은 큰 무덤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17세기 후반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동여 비고(東輿備考)』에서도 군산도 안에 큰 무덤이 그려져 있고 그 아래에 왕릉이라고 쓰여 있다. 이 왕릉을 조선후기의 실학자 성해응(成海應)은 귀인(貴人)의 무덤일 것이라고 추정하였지만, 삼별초군에 가담한 왕족의 무덤일 가능성이 크다. 금제, 은제 그릇을 부장한다는 것은 왕족이 아니면 힘들기 때문이다. 삼별초군이 강화를 떠나 진도까지 항해하는 데 무려 70여 일이나 걸린 것은 이 왕릉 조성과 관련된 것은 아닐까하는 추측도 들지만 사료가 없어 더 이상의 추정은 불가능하다.

14세기에 들어와 군산도는 왜구의 극심한 침략에 시달리게 된다. 왜구는 13세기 초부터 우리나라에 침입하여 약탈행위를 자행하였는데, 14세기에 들어와 이들의 침입은 더욱 빈번해지고, 그 규모도 점차 커졌다. 1323년(충숙왕 10) 6월 왜구는 군산도에 침입하여 개경으로 가는 조운선을 습격하여 조세미를 약탈해갔으며, 다음날에는 추자도에 침입하여 주민을 납치해가는 만행을 저질렀다. 왜구는 14세기 후반에 들어와 더욱 대규모화했고, 또 정규 병력화했다. 특히 1380년(우왕 6) 8월 왜구들은 500척에 이르는 대선단을 거느리고 임피의 진성창(鎭城倉)을 노략질하기 위해 진포로 침입해 왔는데, 왜구의 수는 무려 10,000명 이상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러한 왜구의 대함대를 도원수 심덕부, 상원수 나세, 부원수 최무선이 이끄는 고려 함대가 함포 사격을 통해 궤멸시키니, 이것이 그 유명한 진포 대첩이다. 진포 대첩으로 왜구는 격퇴 당하였으나 이들이 진포에 들어올 때 그 길목에 있던 군산도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왜구들은 지나가는 곳마다 불을 지르고 사람을 죽여 그들이 한번 지나가면 시체가 산과 들판을 덮게 되었다고 할 정도로 잔인하기 이를 데 없었다. 따라서 진포 대첩으로 격퇴당하기 직전에 500척에 달하는 왜구의 대선단이 거쳐 간 군산도에는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았을 것이다. 고려 전기의 수군 시설과 군산정, 오룡묘, 자복사, 숭산 행궁 뿐만 아니라 민가들도 모두 파괴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1864년에 만들어진 김정호(金正浩)의 『대동 지지(大東地志)』와 1896년에 만들어진 『호남 진지(湖南鎭誌)』의 「고군산진지여사례병록성책(古群山鎭誌與事例幷錄成冊)」에서는 군산도의 폐진(廢鎭)과 복설(復設)을 “본래 군산도진은 해랑적(海狼賊)[왜구]들의 침략을 받아 옥구현 북쪽 진포의 해변[지금의 군산진]으로 옮겨갔는데, 인조 2년에 옛 진에 별장(別將)을 두어 고군산이라 칭하였다.”, “옛날 진터가 망주봉의 뒤에 있는데, 해랑적들에 의해 폐진(廢鎭)되었다. 천계(天啓) 갑자(甲子)[1624년(인조 2)]에 복설되었다.” 라고 설명하고 있다. 두 자료를 통해 군산도의 폐진은 고려 말에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진포 대첩 이후에도 군산도 주변에서의 왜구의 노략질은 그치지 않았다. 진포 대첩이 일어난 지 2년 후에 다시 50척의 배가 진포로 침입해 들어온 것이다. 고려 말뿐 아니라 조선 초까지 왜구가 군산도에 출몰하였다. 1406년(태종 6) “남번(南蕃)의 조와국(爪哇國)[자바] 사신 진언상(陳彦祥)이 전라도(全羅道) 군산도(群山島)에 이르러 왜구(倭寇)에게 약탈을 당했다.”와 1407년(태종 7) “[충청도] 수군 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 노중제(盧仲濟)와 도만호(都萬戶) 송전(宋琠) 등이 병선을 거느리고 ··· 왜구(倭寇)를 수색하여 군산도에 이르렀다가 회오리 바람을 만나 배가 침몰하였다.”에 군산도 부근의 왜구에 대한 보고가 올라오고 있다.

조선 초까지 군산도 부근에서의 왜구의 노략질은 그치지 않았다. 따라서 조선 정부에서는 왜구 약탈의 근원지가 되는 섬을 비우는 정책을 취한다. 서남해안도서 지방이 본격적으로 개발되는 시기는 17세기 이후부터인데, 군산도에 수군진도 이 무렵인 1624년에 고군산진이라는 이름으로 설치되었다.

[관련 기록]

군산도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1123년(인종 원년) 송나라 사신으로 왔던 서긍(徐兢)의 글 『선화 봉사 고려 도경』에서 보인다. 『선화 봉사 고려 도경』을 통해 송나라에서 고려로 이어지는 이동항로를 알 수 있으며, ‘군산도’라는 별도의 항목을 통해 군산도의 모습, 군산도에서의 사신 영접과정, 사신 영접에 사용된 송방(松舫)이라는 채색 배[彩舫]와 사신 영접장소인 군산정(群山亭)[『신증 동국 여지 승람』, 『해동역사(海東繹史)』, 『만기요람(萬機要覽)』,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동사(東史)』 등에서 모두 객관(客舘)으로 설명] 외에 오룡묘, 자복사, 숭산 행궁 등을 소개하였다. 오룡묘송방 등에 대해서는 별도로 항목을 설정하여 간략히 설명하였다.

『신증 동국 여지 승람』 전라도 만경현 산천(山川)조에 따르면 군산도는 “[만경]현 서쪽 바다 가운데 있는데, 둘레가 60리이다. 벼랑에 배를 감출만한 곳이 있어 모든 조운(漕運)하는 자는 모두 여기에서 순풍을 기다린다.”고 되어 있어, 군산도 위치와 규모, 기항지로서의 위치 등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내용은 이후 『동사강목(東史綱目)』, 『연경재 전집(硏經齋全集)』, 『만기요람』 등 여러 지리지에도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어, 고려 시대는 물론이고 조선 후기까지 군산도 일대가 해로의 기항지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신증 동국 여지 승람』에는 섬 가운데 마치 임금의 왕릉 같은 큰 묘가 있어 금은기명(金銀器皿)이 많이 도굴된 사실, 군산도 가까이에 와보도(蝸步島)·궁지도(宮地島)·망지도(望地島)·횡건도(橫建島)·허내도(許內島)·가외도(家外島)가 있는데, 이 섬들은 모두 조수가 물러나면 육지와 연결되었다는 사실을 전한다.

『증보문헌비고』 역시 『신증 동국 여지 승람』과 거의 유사한 기록을 싣고 있는데 몇 가지 차이를 보인다. 섬의 둘레에 관하여 조선 초 기록인 『신증 동국 여지 승람』에서는 60리라 하였는데, 『증보문헌비고』에서는 80리라 하였다. 이 외에 『증보문헌비고』에서는 군산에 포함되는 섬들도 추가로 제시하였다.

『고려사』, 『조선 왕조 실록』에도 군산도에 관한 기록이 나오는데, 주로 왜구의 침략, 전라 수영(水營)의 운영 문제가 거론되었고, 『조선 왕조 실록』을 포함하여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일성록(日省錄)』 등의 기록을 통해 군산도가 조선 후기 주요 유배지 가운데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