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군산부사』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700367
한자 群山府史
분야 역사/근현대,문화유산/기록 유산
유형 문헌/단행본
지역 전라북도 군산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병남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간행 시기/일시 1935년 10월 1일연표보기 - 『군산부사』 간행
간행처 군산부청 - 군산시 중앙로 178[중앙로1가 11-1]지도보기
성격 향토지
편자 군산부
간행자 군산부
표제 군산부사(群山府史)

[정의]

1899년 개항 이후부터 개항 35주년이 되는 1934년까지 군산의 역사를 기록해 놓은 자료집.

[개설]

『군산부사』는 1935년 군산부에서 발간한 책으로 총 39장, 356 쪽으로 구성되었다. 『군산부사』는 현재 우리나라 각 지역에서 발간되는 도지(道誌)·군지(郡誌) 등과 같은 성격으로 개항 시기부터 1934년까지의 군산의 정치·사회·경제 등 군산에 대한 거의 대부분의 정보가 기술되었다.

[구성/내용]

제국주의 일본은 쌀과 국내 각지에서 수탈한 각종 물자들을 일본으로 가져가기 위해 1899년 5월에 군산항을 개항시켰다. 더불어 당시 큰 시장을 이루었던 강경·공주·전주 등 조선 내의 상권에 용이하게 침투하여 이익을 최대화하기 위한 전초 기지로써의 역할까지 기대하였다.

이러한 의도로 1900년 8월에는 군산과 오사카[大阪]를 잇는 직항로를 개설하여 일본 본토와 직교역이 가능하도록 하였고, 또한 수탈의 가속화를 위해 1910년 10월에서 1914년 1월까지 대전-가수원-두계-논산-강경-이리-김제-광주-송정리-영산포-목포를 연결하는 약 261.3㎞의 철도를 건설하고, 여기에 더해 이리[익산]에서 군산으로 이어지는 24.8㎞의 철로까지 완공하였다. 이로써 호서, 호남, 영남의 미곡과 수탈 물품들을 군산항으로 신속하게 이송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1908년 당시 군산항의 수출품 중 80%가 쌀이었고, 99%가 대일 수출품이었다.

이와 같이 군산 지역이 가진 지리적 이점으로 1900년 이후 일본인뿐만 아니라 타 지역 사람들도 대거 유입되었다. 타 지역 사람은 개항 이후 촉발된 노동력의 수요와 관계가 있고, 이는 일본인도 마찬가지로 이들 대부분은 군산 조계(租界)에 거주하였다.

『군산부사』에 따르면 개항 직후 군산에 이주한 일본인은 77명, 조선인 511명이었으며 기타 외국인은 거주하지 않았다. 그러나 개항 1년 후인 1900년에는 일본인 422명, 조선인 780명, 기타 외국인 24명으로 거의 6배 가까이 증가했다. 『군산부사』가 나오기 이전인 1934년 군산의 인구 분포도를 보면, 일본인 9,408명, 조선인 27,144명으로 폭발적인 인구 증가 추세를 보이는데 이는 군산 지역이 물류·상업·공업의 중심지로 변모하여 인력의 수요가 증가했기 때문이다.

1934년 현재 군산의 일본인 9,408명 중 야마구치현[山口縣] 출신이 1,355명, 나가사키현[長崎縣] 출신이 868명, 에히메현[愛媛縣] 출신이 602명 순이었고, 이들의 직업은 공무(公務) 및 자유업 1,107명, 상업 및 교통업 831명, 공업 289명 순으로 공무 및 자유업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일본인의 수가 늘어나자 군산 거주 일본인들은 군산 일본 민회(群山日本民會)를 창설하여 일본인 민회 규칙(日本人 民會規則)까지 제정하고 13명의 의원을 선출하였다. 이 민회는 1906년 목포 일본 영사관 군산 분관이 폐지되고 군산에 이사청이 개설되면서 민단법이 시행되자 군산 거류민단(群山居留民團)으로 바뀌었다. 군산 거류민단은 일종의 자치 기구이자 법인체로써 일제의 보호 아래 공공 사무를 처리할 수 있었다.

군산이 1914년 부(府)로 승격되던 해에 일본인들은 교육 사업을 위한 ‘군산 학교 조합’을 발족하였다. 군산 거주 일본인들은 자녀 교육을 위해 학교를 건립·운영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최초의 교육 시설은 1899년에 영사관 분관 주임(領事館分館主任)인 아사야마 겐죠[淺山顯藏]의 부인이 세운 군산 공립 심상 고등 소학교(群山公立尋常高等小學校)였다. 그리고 1912년 11월에는 군산 공립 상업 보습학교(群山公立商業補習學校)가 군산 공립 심상 고등 소학교에 부설되었다.

군산 공립 상업 보습학교는 설립 당시 학생 수가 약 100명이었고 교직원은 1명뿐이었으며 외지의 소학교 직원이 겸무하는 형태였다. 군산 공립 상업 보습학교는 1918년 군산 공립 간이 상업 전수학교(群山公立簡易商業專修學校)로 개칭되었다가, 1923년 교육령의 개정으로 다시 상업 보습학교(商業補習學校)로 개칭되었다.

한편 1911년에 군산 공립 보통학교(群山公立普通學校)가 세워졌으나 3.1운동과 관련하여 불타버렸다. 군산에서도 만세 운동이 일어나자 보통학교 학생들이 적극 참여하였다. 3월 14일에 군산 공립 보통학교 출신인 김학술과 70여 명의 학생들이 동맹하여 퇴학원을 제출하는 운동을 벌였고, 이후 김수남과 이남율이 중심이 되어 23일에 일본의 교육 기관이었던 군산 공립 보통학교를 방화한 것이다. 군산 공립 보통학교는 이후 다시 증축되었으며, 1929년 제1 공립 보통학교로 개칭되었다. 18개의 학급에 학생 1,207명, 직원 20여 명의 규모였다.

또한 군산 공립 중학교(群山公立中學校)는 1923년에 군산부 학교 조합(群山府學校組合)에 의해 건립되어 1928년에 1회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5년제 학교로 10개의 학급이 있었으며, 학생 수는 470여 명, 직원은 20여 명이었다. 이 밖에도 군산 공립 고등 여학교(群山公立高等女學校), 군산 공립 청년 훈련소(群山公立靑年訓練所), 군산 사립 가정학교(群山私立家政學校), 군산 공립 양영학교(群山公立養英學校), 군산 사립 유치원(群山私立幼稚園), 사립 영신 유치원(私立永信幼稚園), 군산 교육회(群山敎育會) 등이 설립되어 일본 및 조선 자녀들의 교육을 주도하였다.

군산 거주 일본인들은 1915년 5월에 전라북도 내 최초로 수도 사업(水道事業)을 시행했다. 급수 대상은 대부분 일본인으로 약 1만여 명이었다.

그리고 1921년 군산 자혜 의원(群山慈惠醫員)이 본관, 전염병실(傳染病室), 간호부 기숙사, 소독실, 해부실 등 5개동, 숙소 3개동 등의 건물을 신축하여 진료를 전개하였다. 1929년에 자혜 의원은 ‘조선 도립 병원 관제 공포’에 따라 전라북도립병원(全羅北道立病院)으로 개칭되었는데, 최초 내과와 소아과 두 개 과로 시작했던 것이 내과·외과·안과·산부인과·소아과·이비인후과·치과·피부과의 8개 과로 분화되었고, 1934년 당시 의사 6명, 의원 4명, 약제사 1명, 서기 2명, 간호사 25명 등이 근무하였다. 이 밖에도 군산에는 대략 20여 개의 사립 병원들이 생겨났다.

또한 인구의 증가와 상공업의 발달로 인해 조선 은행 지점, 조선 식산 은행 지점, 조선 상업 은행 지점, 군산 금융 조합, 옥구 금융 조합, 군산 동부 금융 조합 등의 금융 기관들이 생겨났다.

언론 기관으로는 1904년에 최초로 『군산 일보(群山日報)』가 주간지로 발행되다가 1907년에는 『한남 일보』를 흡수하여 일간지가 되었다. 이후 1919년에는 『실업의 조선(實業の朝鮮)』이란 월간(月刊) 잡지도 발행되는 등 약 18개의 신문 지국 등이 생겨났다.

한편, 1899년에 목포 영사관 군산 분관 소속으로 설치되었던 군산 경찰서는 1906년에 군산 분관이 없어지고 이사청이 들어서자 이사청 소속으로 바뀌었는데, 일제가 조선을 병탄한 1910년 이후 조선인과 기타 외국인들에 대한 치안 유지와 탄압 역할을 자행했다. 1934년 현재 서장, 경무계 주임, 위생계 주임, 고등계 주임, 사법계 주임, 보안계 주임 등에 각각 1명씩 배치되었으며 5개과로 분리되어 있었다.

조그마한 촌에 불과하던 군산이 짧은 기간에 근대적 도시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호남 평야를 끼고 있었고 항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군산항은 개항 초기 입지 조건이 좋거나 규모가 큰 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일본은 수탈의 전초 기지로 삼기 위해 군산항을 꾸준히 수축(修築)[집이나 다리, 방죽 따위의 헐어진 곳을 고쳐 짓거나 보수함]했다. 일본의 산미 증식 계획이 발표되자 1926년에는 거금을 들여 7개년 계획으로 항만 수축을 진행할 정도였다. 당시 군산항 수축 공사 기공식에 참여한 사이토 마코토[齊藤實] 조선 총독은 부두에 집적된 쌀을 보고 “아! 쌀의 군산이여”라고 탄성을 지를 정도였다고 한다. 일본은 계획대로 1933년 3월에 항만 수축 공사를 완료함하여 3천 톤급 6척이 접안할 대규모 항구를 건설하였다.

그리고 이로 인해 쌀에 대한 수탈은 1925년 99만 8,769석(石)에서 1934년에는 228만 5,114석(石)으로 가파르게 증가하였다. 이 쌀들은 오사카[大阪], 고베[新戶], 도쿄[東京] 등지로 보내졌다. 쌀 수탈의 증가와 함께 군산항의 무역액 역시 1925년에는 총 5,608만 111엔(円) 중에 수출이 3,773만 8,706엔을 차지한데 반해, 1934년에는 총 7,439만 3,371엔에서 수출 비중이 5,595만 904엔으로 상승하는 추세였다.

[의의와 평가]

『군산부사』에는 군산이 조그마한 촌에서 거대한 항구 도시로 바뀌게 되는 과정이 기록되었으며, 개항 당시와 1900년 이후 증가하는 일본인의 수와 출신 지역이 비교적 자세하게 서술되었다. 또한 군산에 이주안 일본인들이 만든 자치 기구 성격의 일본 민회와 일본 거류민단의 조직 과정과 활동이 관련 자료와 함께 기술되었다.

특히 『군산부사』에는 군산에 설치된 의료 기관, 경찰서 등 제반 시설의 연혁과 규모가 함께 실려 있어 『군산부사』는 지방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많은 도움을 준다. 또한 군산항의 수출입 규모와 액수, 수출입 물품 목록 등이 1899년에서 1934년까지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군산부사』는 일제의 수탈에 대해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자료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