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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입임피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702144
한자 再入臨陂郡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작품/문학 작품
지역 전라북도 군산시
시대 고려/고려 후기
집필자 이재용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저자 생년 시기/일시 1168년 - 이규보 출생
저자 몰년 시기/일시 1241년 - 이규보 사망
편찬|간행 시기/일시 1241년 8월 - 이규보 아들 이함 『동국이상국집』 간행
특기 사항 시기/일시 1199년~1201년 - 이규보 전주목(全州牧)에 사록겸장서기(司錄兼掌書記)로 부임
출생지 이규보 출생지 - 경기도 여주
성격 고율시
작가 이규보

[정의]

고려의 대표적인 문인 이규보(李奎報)가 전주에 부임하여 만경, 임피, 옥구 등을 시찰할 때 지은 고율시.

[개설]

이규보의 자(字)는 춘경(春卿), 호는 백운거사(白雲居士)로, 만년에는 시·거문고·술을 좋아하였다 하여 삼혹호 선생(三酷好先生)이라 부르기도 했다. 최씨 정권의 신임을 얻고 벼슬을 하던 32세 때 사록겸장서기(司錄兼掌書記)로 전주에 부임하였다. 당시 그가 쓴 시가 60여 수인데, 「재입임피군」은 그 중 군산시의 “임피”라는 지명이 적시되어 있는 작품이다.

[구성]

일곱 자 팔 행의 시. 특별한 사건을 서술한 시가 아니기에 서경과 서정이 두 행씩 번갈아 두 번 나온다. 1~2행은 임피군에 들어서면서 보이는 모습을 그리고, 3~4행은 객(客)으로서 느끼는 곤고함을 보여주었다. 5~6행은 마을에 들어서서 객사에 들어 보이는 모습을 그리고, 7~8행은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느낀 겸사를 담았다.

서경을 담은 1~2, 5~6행에는 물가의 푸른 빛과 버들의 푸른 빛, 깃발의 붉은 빛과 사립에 어리는 꽃 색이 서로 호응한다고 볼 수 있다. 3~4, 7~8행에서는 자신을 “약하고 병든 몸”, “외롭고 야위어” 있는 상태로 인식하여 시적 정조를 유지하였다.

[내용]

이 시의 창작 시기는 정확하지 않다. 「남행월일기」에 의하면 이규보는 전주에 부임한 후, 변산·금산·남원 일대를 돌아다니며 벌목장을 감독하거나 배를 조사하는 등의 여러 일을 하였다. 1200년(庚申年)에 만경·임피·옥구에 들러 며칠을 묵었다고 기록했으나 이 때 작품을 창작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여기서는 전주에 부임한 시기를 감안하여 1199년으로 추정하였다.

『동국이상국집』에는 이 시 외에도 옥구 일대에서 여러 날 묵었음을 추측할 수 있게 하는 기록들이 있다. 그 중에서도 옥구현(沃溝縣)에 사는 고항중(高抗中)과 주고 받은 시는, 가난하여 집이 없는 고선생을 위하여 고을 원에게 청하여 집을 지어준 사연이 담겨 있기도 하다. 이규보가 단지 관리로서 직을 수행했을 뿐만 아니라 임피·옥구 일대의 선비들과도 교유했다는 것을 알려준다.

「재입임피군」은 그러한 시편 중에서도 축약의 묘를 살리면서도 조정에서 온 한 관리가 객관에 드는 모습을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어 지역 문화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성격을 띤다 할 수 있겠다. 다음에 시편을 제시하겠다. 번역은 『군산 시사』를 따랐다.

재입임피군(再入臨陂郡)        [두번째 임피군에 들어가다]

고현의연접수미(古縣依然接水湄) [옛고을 여전히 물가에 접했는데,]

전구홍패불림귀(前驅紅旆拂林歸) [앞에 달리는 붉은 깃발 수풀을 스쳐 돌아가네.]

왕래유유앵상식(往來惟有鸎相識) [오고갈 제 꾀꼬리만이 아는 체하니,]

쇠병나감마사비(衰病那堪馬似飛) [약하고 병든 몸이 어찌 나는 듯이 달리는 말을 견디랴.]

객사신제수류로(客舍新除垂柳路) [객사엔 버들 늘어진 길 새로 닦았고,]

인가반엄영화비(人家半掩映花扉) [인가에 꽃 비치는 사립문 반쯤 닫았네.]

참군고수난감견(參軍孤瘦難堪見) [참군이 외롭고 야위어 볼품도 없는데,]

사녀하수취작위(士女何須聚作圍) [사녀들은 무엇하러 떼지어 둘러 싸나.]

[의의와 평가]

이규보는 “문벌 귀족이 가졌던 규범적인 사고 방식을 따르지 않고, 현실을 새롭게 인식하며, 민중의 삶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주체적인 문학을 이룩하자는 방향”을 문학 작품을 통해 내보였던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재입임피군」은 지방의 곳곳을 직접 지나며 그들의 생활에 애정을 기울였던 관직 생활 초기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문인이자 유학자로서의 겸손함을 보이면서도 지나친 표현을 삼가 소박한 마음을 그대로 표현한 시의 구절구절은 최자가 말한바, “한 번 갈겨 쓰는 데 백 장을 쓰더라도 모두 옛사람의 것을 그대로 답습하지 않고 탁연히 제절로 이루어진다.”라는 평가가 적절함을 여실히 보여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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