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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초도 금돈 시굴 전설」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702073
한자 內草島金豚始窟傳說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유형 작품/설화
지역 전라북도 군산시
시대 고대/삼국 시대/신라
집필자 박순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채록|수집|조사 시기/일시 1980년 7월 10일 - 「내초도 금돈 시굴 전설」 채록
채록지 「내초도 금돈 시굴 전설」 채록지 - 전라북도 군산시 소룡동 지도보기
성격 전설
주요 등장 인물 최치원|아버지
모티프 유형 설화
제보자 김희석[남, 70세]

[정의]

전라북도 군산시 소룡동에서 채록한 전설.

[채록/수집 상황]

1980년 7월에 채록된 「내초도 금돈 시굴 전설」은 내용만 전해지고 있다.

[내용]

경주 최씨의 시조로 신라 말엽의 대석학인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을 든다. 최치원은 그 높은 학문이 이 나라는 물론 멀리 중국에까지 널리 알려진 성리학자일뿐 아니라 동방 문학의 시초를 이룬 문호로도 이름이 높다.

그런데 이 최치원은 기이한 전설을 남기고 있다. 원래 경주 최씨의 시조는 금빛 나는 돼지에서 낳았다 하여 일명 ‘돼지 최씨’라고 불리어 오는데 이것은 단군이 곰에서 낳았다는 전설과 또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가 박 속에서 낳았다는 우리 전래의 민족 설화와 함께 이 경주 최씨에 관한 것도 중요한 민족 설화의 하나가 되어 있다. 그 설화가 지금은 행정상으로 옥구군에 속해 있는 고군산 열도의 하나인 내초도(內草島)와 연관되어 다음과 같이 전해지고 있다.

"최치원의 아버지가 하루는 내초도라는 섬으로 사냥을 나갔다가 누런 황돼지한테 붙들려 바위 밑 토굴로 끌려가서 몇 달 동안 사는 동안에 황돼지에 태기가 있어 열달 후에 아들을 낳았다.

그 아들이 점점 자라나자 아버지는 아들을 데리고 육지에 나오려고 해도 못나오고 황돼지와 같이 짐승처럼 살게 되었다. 하루는 어미 돼지가 이웃 섬으로 사냥을 나가고 없는 새에 다섯살 난 아들에게 아버지는 사실 이야기를 다하면서 치원이 너를 육지로 데리고 나가 공부를 시키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나 빠져나갈 재주가 없다고 한탄을 했다. 이 말을 듣고 있던 아들은 어미 돼지가 날마다 해다 놓은 나무 토막을 몰래 엮어서 배를 만들어서 타고 나가자고 제의했다.

그리하여 어느 날 돼지가 또 산에 나무를 하러 나간 사이에 나무를 발처럼 엮은 뗏목을 타고 육지로 나오는데 어느새 어미 돼지가 알고서 헤엄을 쳐 쫓아오고 있었다. 금새 앞발이 배에 닿을 듯하자 아들이 미리 잘라서 실어놓은 나무토막 하나를 던져 주었다. 욕심이 많은 돼지는 나무 토막이 떠내려 갈까 봐 아까워서 얼른 물어다가 섬에다 갔다 두고 또 쫓아오자 아들은 계속 나무 토막을 던져주어 끝내는 어미 황돼지가 기진 맥진해서 죽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서 육지에 당도한 아들은 머리가 총명하여 아버지의 가르침에 따라 열심히 공부해서 뒷날에 훌륭한 인물이 되었으니, 그가 바로 경주 최씨의 시조요 신라의 대문장가였던 최치원이라고 한다."

이러한 설화에 의해서 옥구군 일대에서 경주 최씨는 금돼지의 자손이라는 말이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으며, 내초도에는 금돈 시굴(金豚 始窟)이라는 굴이 아직도 그 흔적을 나타내고 있다. 그래서 경주 최씨금돈 시굴에서 낳았다는 전설상의 최치원은 바로 내초도 안에 아직도 그 흔적을 남기고 있는 금돈 시굴이 삶터 출생지(出生地)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최치원이 전설상으로만 전해지는 인물은 아니다.

『삼국유사』와 『여지 승람』에는 그의 뛰어난 사적을 정사(正史)에 담고 있고 또 그만한 출중한 인물이기에 그만한 전설상의 이야기를 남기고 있는 것임에 분명하다. 다만 그의 출생이 오늘날에 와서 믿을 수 없는 금돼지에서 낳았다는 것인데 이것이 「내초도에 있는 금돈 시굴」과 묘한 일치를 보이고 있다는데 비상한 흥미를 끌고 있는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이와 가까운 사실을 뒷받침이라도 하듯 군산 지방의 인근인 옥구 일대는 최치원과 얽힌 사연을 여러 가지 문헌상에서 찾아볼 수 있다. 지금 옥구면 상평(上坪) 마을에 있는 자천대(紫泉臺)가 바로 그것이다. 『옥구 구지(沃溝 舊誌)』에 나타난 이 자천대최치원이 일찍 당나라에서 큰 벼슬과 학문을 닦고 나라에 돌아왔을 때 세상이 극도로 어지러워 민심이 흉흉하자 그 홀로 이 자천대에 올라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독서 삼매로 시름을 달랬다는 것인데 애당초 이 자천대는 옥구의 현 비행장 안에 있었던 것을 상평 마을에 옮겼다는 것으로 원자 천대(元紫 泉臺) 부근에 곧고 매끄러운 암석 위에는 최치원의 무릎 자국과 먹을 갈았던 흔적이 남아 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옥구 구지』에는 또 그가 당나라에서 귀국하여 이 고을의 태수(太守)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고 이보다 더 큰 벼슬이 내렸어도 그는 이를 사양하고 이곳 태수만을 지냈다고 한다.

아무튼 최치원과 옥구 땅은 이러한 일련의 전설을 통한 기이한 인연을 맺고 있는 것이 틀림없고 그래서 내초도금돈 시굴에서 최치원이 낳았다는 설화를 밑받침하고 있는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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